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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Dec 22. 2017

조제는 특별하다

 – 타자에서 당당한 주체의 자리로

  처음에 나오는 사진 장면들부터 느낌이 불안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려주는 흔적들 같았다. 영화를 보면서 무엇의 죽음을 알리는 사진들이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죽음은 다른 탄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죽음이 없다면 탄생도 없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역시 흔한 러브스토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흔한 러브 스토리들과 결코 같지 않다. 그 느낌은 주인공인 조제의 말처럼 바다 밑에서 '조개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같은 이물감이다.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는 엔딩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들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서사에 익숙해진 관객의 정서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이별이며 닳고 닳은 러브스토리 중에 이 영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츠네오는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스타일이다. 특별히 상대방을 배려해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는 법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충격적인 것은 결국 그가 평범하다는 데 기인한다. 평범이라는 말은 주인공과 관객 사이에 벽을 없앤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가 된다.


  그렇게 충격적으로 평범한 대학생인 츠네오는 조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조제는 평범한 여대생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녀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더군다나 가족이라고는 없는 고아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모든 상황을 뒤엎는다. 


  방에 갇힌 채,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으로만 세상을 만나왔던 조제의 마음속에는 늘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욕망 중엔 물론 여자로서 남자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제의 말처럼 츠네오를 만나기 전의 세상은 빛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 심연이었다. 정지하듯, 흘러가듯 그렇게 천천히 가던 시간은 이제 너무 빨라서 카메라 속에도 제대로 담기지 않을 만큼 숨 가빠진다. 조제에게는 유모차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등이 있고, 다정한 포옹이 있으며 둘만이 나누는 말 없는 언어가 있으니까. 


  하지만 책이 주는 무한한 정신적 공간 속에서 내공을 키워왔던 조제는 결코 평범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게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그 시간이 끝나버릴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조제는 불안한 마음으로 행복을 덮는 우는 범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젖가슴을 지녔지만, 조제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순간들을, 자신에게 허락된 연인을 충분히 소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소유했던 사람에게는 서툰 미련 같은 건 남지 않는다. 나중에 당한 아픔이 두려워 미리 포기하는 일도, 방어막을 철저하게 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온전하게 소유했던 사람만이 버릴 수도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벽장 속에서 작은 등불 하나로 버티면서 익숙해졌던 수많은 시간은 그녀의 자산이었다. 타인에게서 사랑을 받지 않아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였던 조제는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이따 저녁때 만나자는 말을 하듯 쉽게 이별을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애인에게 돌아가는 츠네오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울음을 터뜨린다. 어리둥절한 관객은 그때야 비로소 그들이 이별했음을 깨닫는다. 옛 애인이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츠네오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친다. 밥상은 츠네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조제가 차려주던 밥상은 여태까지 맛보지 못했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상이었다. 반찬 한두 가지에 흰 쌀밥과 국에 불과한 소박한 밥상은 조제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제 할머니의 권유 때문에 마지못해 한술 뜨던 츠네오의 눈빛과 표정이 변하는 순간이 두 사람 관계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조제와의 헤어짐은 옛 애인과의 재회처럼 결코 되풀이될 수 없다. 완전한 끝인 것이다. 조제와의 사랑은 다른 여자 친구들과의 교제와는 다르다. 조제와의 사랑은 그 시작이 쉽지 않았듯이 헤어짐도 결코 쉬울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시작했고 너무 담백하게 헤어진다. 


  장애인에게는 장애인으로서 지켜야 할 테두리가 있으며 그 선을 넘지 않아야만 상처받지 않는다고 믿는 할머니가 계속 존재해있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만남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죽음은 또 하나의 자유, 새로운 시작, 새로운 탄생을 선사한다. 세상에 대해 강력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벽이 없어졌다는 걸 뜻한다. 기성세대의 방어막이 없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다. 만남도 헤어짐도 자발적이다. 그들의 만남엔 어떤 핑곗거리도 있을 순 없다.    


  물론 조제에게 츠네오와의 이별이란 세상으로 향한 문이 닫히는 듯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세상이 닫힌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그렇지만 죽음 뒤에 있는 것은 암흑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다.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조제는 다른 문을 또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츠네오를 위한 밥상으로 의미가 시작됐지만 이제 츠네오가 없어도 조제는 식사를 준비한다. 자신만을 위한 식탁을 차리기 위해 차분하게 생선을 구워낸다. 그리고 남의 등에 업히지 않아도, 남이 끌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유모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조제는 이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선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띠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이 수없이 반복되고 그 중엔 정말 기억에 떠오를까 무서울 만큼 가슴 아픈 헤어짐도 있지만 헤어지는 순간 우린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자신만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해도 나는 어제의 나와는 또 다른 나이다.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과 만남, 그것 역시 새로운 만남이다. 그래서 조제와 헤어진 츠네오는 가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조제를 떠올리고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츠네오가 조제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고, 조제는 변함없이 생선을 굽고 연근을 조리고 계란말이를 하면서 자신만의 식탁을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순간 츠네오의 품 안에서 조제가 예언하듯 했던 말처럼 가끔 아픈 추억을 떠올리며 사는 삶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 <신경증자 재스민의 영화로 버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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