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필요해
수많은 책의 제목들이 위로를 건넨다.
위로의 말이 넘치는 사회다. 심리치유에세이라는 노골적인 장르는 내가 소시적에는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심리치유에세이라고 제목부터 심리치유가 목적이다라고 드러놓고 얘기하는 장르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치유를 받았다. 노골적인 위로가 도리어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대학생 시절 내 경우는 특히 소설로부터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 받는 방식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나 같은 경우는 특정한 작가의 문장 한 줄을 나름대로 해석해 위안을 삼는 경우가 많았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내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서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다. 지금 같으면 카톡 배경 화면에 띄워놓았을 테지만. 매체는 달라지지만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들은 비슷한 행동을 한다. 기본적인 심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현상만 달라질 뿐이다.
이제는 자신만의 방식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직접 자신을 위로해주는 글귀를 원한다. 그림까지 곁들여 있다면 금상첨화다.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설명투의 글귀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삽화가 더 강력하고 오래 잔상으로 남아있다. 힘든 세상에서도 천진함을 잃지 않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위로를 주는 게 사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또 다른 따스한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각박한 세상에서 상처받고 헤매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면 삶은 유머러스해지고 바보짓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도리어 매력만점이다. 그래서 나는 일러스트를 좋아한다. 나만의 위로 공간은 꼭 필요하다.
시중에 나온 책들의 제목만 봐도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지치고 상처받고 출구를 찾아 헤매는지 보인다. 세상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출구가 안 보인다면 나만의 출구로 당당하게 나가겠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시대가 됐다.
거기에 sns의 한 줄 격려나 위로는 죽은 사람도 살리고, 반대로 악플은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일 정도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 공간은 오직 자신만이 주인공인 상상의 공간이다. 그러니 단어 하나 이모티콘 하나도 회오리 바람이 되어 나를 지배한다. 모두가 자신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천국이 되기도 하고 모두가 싸늘하게 외면하고 멸시하는 지옥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 공간은 사실 나의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상의 공간은 현실과 냉정하게 구분지어 보아야 한다. 휩쓸려서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sns에서 칼날을 휘두르고 내게 오물을 뒤집어 씌우더라도, 나를 왕처럼 떠받들더라도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전원을 끄는 순간 사라지는 세상이다. 차단하면 영향을 주지 않는 세상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내게 이익을 주는 쪽으로 적당히 이용하면 그뿐이다.
위로가 절실한 사회가 됐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강요받았던 (사회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든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가치나 선은 이제 더 이상 인정되지 않고 그러므로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대신 나도 너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기대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내 상황에 맞게 잘 살고 있다는 말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준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열나게 외쳐대는 자기 계발서, 외국어 잘하는 법에 대한 책, 학습 도서들이 여전히 잘도 팔려나가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고 다독여주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양쪽 다 내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나이가 들만큼 든 내게는 공허한 말들처럼 들린다. 내게 매력있는 세계는 다른 곳에 있다. 그 근원이 좀더 내밀하고 복잡한 골목처럼 찾아헤매야 하는 영역이 더 매력적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썼던 문화적, 역사적 기록을 더듬고 분석하는 작업이 더 위안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위로의 말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친구가, 가족이 건네는 위안의 말과 글이 잠시나마 좌절감에 빠진 나를 살린다. 그리고 그 잠시의 영향력은 내가 다시 내면에서 힘을 끄집어 낼 때까지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위로는 꼭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공허하더라도 위로의 말을 꼭 해달라고 주변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