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죽고싶어할까

by 이화정

죽고 싶을 때라는 말은 검색어 순위가 높은 문장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죽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싶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존재이다. 가끔 동물들이 집단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의심되는 현상이 화제가 될 때도 있지만 그런 사건이 화제가 될 수 있을 만큼 동물의 자살이란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다. 동물은 어떤 환경이든 그냥 수용하면서 살아간다. 현재 상황을 과거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우울해하지도 않고 더 좋은 환경에 있는 동물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는다. 몸이 다치거나 아프면 그대로 견디면서 살아가고 죽음이 다가오면 스스로 죽을 장소를 찾아가 조용히 죽는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거나 현재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남들이 보기엔 특별한 이유가 없어보이는데도 우울증에 걸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비해 동물들은 훨씬 의연하게 보인다. 죽는 순간을 앞당기려 몸부림 치지도 않고 저항없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동물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있다. 동물의 죽음은 생각보다 여운이 오래 간다.


애완용 래트를 두 마리 키운 적이 있다. 래트는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법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1년 남짓의 짧은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래트는 지능이 높은 동물이다. 특히 길 익히는 데는 명수다. 집안에 뭐가 있는지 금방 파악한다. 한번 숨었다가 들킨 장소에는 결코 다시 숨지 않는다. 우리집 래트들은 1년 2개월 정도 살다가 일주일 간격으로 사망했다. 번식 기능이 너무 좋아서 새끼를 자꾸 낳을까봐 암컷만 두 마리 키웠다. 임신과 출산을 겪은 래트는 수명이 짧아진다길래 우리 래트는 좀 더 오래 살 줄 알았으나 새끼를 낳지 않아서 그런지 한 마리는 젖주변 부위로 몸에 비해 엄청 큰 종양을 달고 다니다가 죽었다. 래트는 신음소리나 비명 한번 지르는 법이 없었으나 통증이 느껴지는 게 분명했다. 여름철이었는데 움직임이 급격히 둔화되면서 시원한 곳을 찾아 배를 대고 엎드려 있곤 했다. 죽는 날엔 아침부터 좋아하는 간식도 거부하고 눈물을 한 두 줄기 흘렸다. 다른 한 마리는 계속 불안한 몸짓으로 내 뒤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나를 따라다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잡힐까봐 피해다니기에 바빴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한번 굴리더니 그대로 죽었다. 동물이 몸으로 보여주는 무언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동물은 자신의 죽음에 '왜'라고 묻지 않는다. 생존경쟁에서는 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지만 인간처럼 죽음의 도래를 지연시키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생을 포기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삶이 주어지면 그냥 살아갈 뿐, 그 밖에 삶의 목적이나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머리가 발달된 복잡한 인간들만이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한다.


자살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일찍 자살을 꿈꾼다. 어떤 상황이 십년 정도 지속되면 회의가 느껴진다고 한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시기도 생각보다 빨라서 열살 정도에 처음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그때쯤이다. 물론 매우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아셨다면 아무 걱정도 없는 환경에 무슨 배부른 투정이냐라고 코웃음 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나이에 벌써 내 삶이 별로 가치있어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걱정이 없다고 해서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춘기 때, 대학생이었을 때, 죽고 싶을 때는 늘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지속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이가 든 지금도 내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자살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쉴 새 없이 떠올린다. 물론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은 내 얼굴을 하고 있다. 상투적인 이미지들이다. 뛰어내리는 이미지, 목에 밧줄을 거는 이미지들이 머릿속에서는 자동 반복된다. 삶을 끝낼 방법이 있다는 것이 때로 위안을 줄 거라고 내 스스로 믿는 모양이다. 상실감이나 패배감으로 너무 괴롭고 힘들 때 이 상황을 종료할 방법이란 그 방법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게 내 상상력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반복도 어느 순간엔가 끝난다. 그리고 나는 어느 새 현실 속으로 들어와 있다. 아이들의 목소리, 친구나 지인의 메시지가 나를 두들겨 깨운다. 그렇다고 상황이 바뀐 것은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그 상황을 견딜 힘이 공급됐을 뿐이다. 그리고 나를 살리는 힘은 그 작은 깨움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 종료된다면 자살에 대한 꿈을 깨끗이 잊을 것 같은가. 내 경험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건 잠시에 불과하다. 선천적으로 불안한 존재인 인간은 또 다시 삶의 회의를 느낄만한 일을 모색하고 나선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는 또 여러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어떤 행동으로 뭔가를 종료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아주 조그마한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삶이다. 불행 끝 행복시작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고 인류의 역사를 둘러보라. 인간은 끊임없이 괴롭게 살다가 생을 마친 존재들이다. 그들은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인간은 동물에 비해 매우 약하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렇지만 자신을 버티게 해줄 추상적 세계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그것을 버팀목 삼아 견디어 왔다. 자신에게 맞는 어떤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장 행복할 때는 역설적이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