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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Feb 15. 2018

너를 보내는 숲

                                                                                             

당신은 숲을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나무들이 태양이 가릴 정도로 울창한 숲, 그리고 그 안에서 하필 장대같은 비까지 내려 쫄닥 맞아본 경험이 있는가.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숲에서 출구를 알 수 없는 상황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프레임이 터질 정도로 한가득 메운 푸른 이파리들로 영화는 시작된다. 푸른 이파리들은 땅도 메우고 있다. 바다 물결을 보는 듯이 풀들은 바람을 따라 일렁인다. 마치 살아서 숨쉬는 듯하다. 
위 아래가 모두 푸른 세계 사이로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그들이 들고 있는 빨간 색 우산이 대비를 이룬다. 이 영화의 주제가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감독은 첫 장면부터 암시하고 있다.
 
설명이 필요한 영화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 느끼는 영화가 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욕심을 갖고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영화가 있다면 펼쳐지는 대로 볼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아픔을 똑같이 지니고 있는 시게키 노인과 마치코. 시게키는 아내를 잃은 지 33년이 됐지만 아직도 아내의 품안에서 살고 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아내의 환영이 허깨비 같은 그의 삶을 실낱같이 이어주고 있다. 마치코 역시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안고 산다. 소중한 사람을 어떤 식으로 잃었는지는 이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 않다. 그들이 지닌 상처, 상실감, 허무함이 그들 삶 속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아픔을 느끼는지도 영화에선 설명하고 있지 않다. 

영화를 가득 채운 것은 시종일관 거대한 녹색이다. 녹차밭에서 두 사람이 숨바꼭질을 할 때, 차 사고가 난 뒤, 마치코가 노인을 찾아 헤맬 때, 그리고 두 사람이 마치 방향을 잃은 듯 숲을 헤매고 다닐 때도,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말없이 일렁이는 녹색 이파리들이었다. 

녹차나무사이 고랑에 몸을 숨기는 노인과 그를 찾는 마치코의 흰색 의상은 녹색과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흰 이빨 사이에 낀 붉은 색 고추가루처럼, 그리고 옷 섶 속에 숨은 이처럼 생경스럽다. 숨고 싶지만 숨어지지 않고 일치가 되고 싶지만 일치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가득 메운 녹색, 특히 후반부에 계속 되는 숲속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햇빛조차 잘 스며들지 않는 숲 속의 색깔은 어둡다. 그리고 그 숲엔 아내인 마코의 무덤이 있다. 과연 그곳은 진짜로 그 아내의 무덤이었을까. 아니면 무덤이라고 믿고 싶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흙을 파내고 그 속에 몸을 눕힌 노인은 편하다고 말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눕힌다.

여기서 내가 본 숲은 죽음과 맞닿은 공간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33년간의 일기장을 펼쳐보일 수 있는 곳,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헬기가 떠도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곳, 그곳은 현세에서 느낄 수 있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공간이다. 고다르의 영화 아워 뮤직에서 천국이 숲으로 표현됐듯이 현실 속에서 이승의 세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숲이 아닐까.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즉 생명이 생긴 시초로 돌아간다는 것의 배경은 숲, 아니면 바다로 표현된다. 원초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김기덕의 영화, '섬'과 '활'에서, 프랑소와 오종의 영화 '타임 투 리브'에서 죽음과 맞닿은 곳은 바다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선 숲이다.  

영화 중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사는 것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밥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말그대로 물리적인 삶과, 다른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삶. 
그렇다면 이 노인은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이다. 33년 전에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역시 함께 그 숲에 묻혀진 삶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아이를 가슴에 묻은 마사코 역시 노인의 슬픔을 막연하게나마 어루만질 수 있다. 몸을 피할 곳도 인적도 없는 숲 속에서 내리는 장대비는 공포다. 그런 공포 속에서 마사코와 노인은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마사코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신적으론 죽었지만 죽어지지 않는 삶은 괴롭고 힘들다. 그들 역시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춥고, 지칠 땐 지친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다.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운 날씨에 서리해 온 수박을 깨뜨려 서로의 입안에 넣어주면서, 시원하다, 달다, 꿀맛이다 라는 말을 반복할 수 있고, 비가 그친 뒤, 숲속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아, 따듯하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육체는 아직도 살아서 자신의 느낌을 순간 순간 주인에게 전달하고 그 순간만큼은 작은 행복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한계는 바로 거기에 있다. 육체에 갇혀 있는 한 그게 인간의 한계다.

이런 분리된 삶을 끝내고자, 시게키 노인는 비가 쏟아지는 데도, 몸이 지쳤는데도 아내가 묻힌 곳을 찾아 미친 듯이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아내의 환영을 본다. 그는 육체에 갇혀 괴로워하는 자신의 영혼을 그만 놓고 싶다. 그리고 아내 곁으로 가고 싶다. 그래서 땅을 파고 그 안에 묻히는 흉내를 낸다. 아, 편하다를 반복하면서.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시게키 노인이 이 세상에 머물 시간은 얼마 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사코의 삶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숲 속에 갇힌 채 그 너머에 있는 태양빛을 그리워하고 질투하면서, 혹은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살게 될지, 아니면 스스로 그 숲을 나오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라기보다는 짧은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아니면 한 장의 대형 그림 같은 영화였다. 한 장면으로도 그 주제가 설명되는 듯한 그림 말이다. 그런데 난 숱많은 이파리로 하늘을 가린 그 숲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숲속의 서늘한 그늘이 머리통 한 구석을 섬뜩하게 하는 그 느낌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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