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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Feb 16. 2018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짜일까

  어린 시절에는 꿈을 꾸고 일어난 후 현실에 금방 적응하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어릴 때는 엉뚱한 생각도 많이 했는데 혹시 우리가 사는 현실이 꿈이고 꿈을 꾸는 순간 진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었다. 병원에 가자라는 말이 나올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눈의 여왕>이나 TV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을 보면서 다른 세상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마녀가 살고 있는 마법의 세계로.’로 시작되는 이상한 나라의 폴 주제가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마법의 지팡이로 치면 아무데서나 입구가 생기는 이상한 나라의 폴과는 달리 동화에서는 옷장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가 있으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다른 쪽 벽에서 열리는 행운이 내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는 숲속 동굴에 들어갔는데 안쪽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계속 그 빛을 찾아들어가자 갑자기 구멍이 넓어지더니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 세상을 찾아가보고 싶기도 하다.

  

  기분이 좋을 때는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다가도 힘들 때는 세상이 지옥 같아 보이니 이 세상도 여러 겹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데이빗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에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한 여성의 꿈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스릴러 장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현재 의문시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사를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본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암시되면서부터 혼란은 가중된다. 최근에 재개봉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난 뒤, 모욕당했다는 듯이 욕을 하고 나가는 관객도 봤다. 서사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서사 층도 여러 겹으로 돼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고 현실이 있고 그 다음에 또 환상과 겹쳐진다.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해가 안 되면 몰입도 안 되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반대로 깊은 잠 속에 빠지듯, 꿈을 꾸듯 영화 속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인간이 일상에서 겪는 것들 중에 가장 신비로운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은 내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너무나 손쉽게 만들어지는 창작품이다. 그래서 꿈은 신이 내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목적이 소원성취라고 했다. 잘 기억나지 않는 꿈이었다고 하더라도 난 내가 소원성취의 꿈을 꿨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자고 일어났을 때 마치 뭔가를 성취한 것처럼 뿌듯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파편으로 남아 있는 꿈의 흔적들이 내가 평소에 원하던 것을 꿈에서 이뤄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볼 때마다 빠져드는 탓에 또 보기가 겁나는 영화다. 데이빗 린치는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현실과 꿈의 관계를 매우 흡사하게 엮어내어 영화로 만들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이미 꿈속 장면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꿈이라는 것을 안 뒤에 보니 정말로 내가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 나오미 왓츠가 연기한 캐릭터가 꾸는 꿈은 자신의 욕망대로 현실을 변형시킨 것이다. 현실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욕망이 변형되어 꿈으로 나타난다. 꿈은 한번만 꾸면 그것으로 끝이다. 한번 꾸었던 꿈을 머릿속에서 복기하기란 불가능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다시 보면 한번 꿨던 꿈을 반복해서 그것도 선명하게 복기하는 것 같아서 섬찟할 때도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의 삶도 꿈처럼 허망하게 끝나리라는 예감 때문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세상도 사실은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은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 이면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 뒤통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눈을 뻔히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내 무의식 속에 있는 어떤 것이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뇌에 등록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워쇼스키 감독이 만든 <매트릭스>의 개봉은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반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식스 센스>처럼 기존의 영화 관습을 완전히 뒤집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소름이 끼쳤던 것은 영화에서처럼 가짜를 진짜로 믿는 상황이 지금의 내 현실일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다만 AI에 의해 지배되는 대신 진실만 등록하지는 않는, 가끔은 가짜도 진짜인 것처럼 등록하는 나의 뇌에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주변 인물에 대한 인식이 수시로 바뀌는 걸 보면 어떤 걸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심지어 십여년전, 혹은 몇 십년이 지난 과거인데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내 행동이나 생각이 잘못 됐다는 걸 이제야 인식하고 등에서 식은 땀이 날 때가 있다. 

  

  더 나아가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아는 것만큼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매트릭스>에서처럼 빨간 색 약과 파란 색 약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많다. 빨간 색 알약을 먹으면 가짜 현실에서 벗어나 진실을 알게 되지만 힘든 여정이 시작되고 파란 색 알약을 택하면 지금처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가짜 세상에서 계속 살게 된다. 키아누 리브스가 맡은 영화 캐릭터처럼 모든 사람들이 빨간 약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외로 파란 약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은 대부분 파란 색 알약을 택하지 않을까.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변화를 감당하기에 버겁고 남은 시간이 많지도 않으니까. 그냥 지금 알고 있는 세상에서 그대로 머물다가 떠나기를 원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하게 보일지라도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는 것이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빌리지>와 <트루먼 쇼>는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빌리지>는 안전이 보장된 세상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범죄를 겪은 피해자들은 모여서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들은 야생동물보호구역에 마을을 만들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마을을 둘러싼 숲속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부인들이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마을을 만든 원로들이 정한 금기사항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안전하다고 믿은 마을 내부에서도 위험요소가 발생하고 외부로부터 도움을 요청해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비밀은 새어나가고 만다. 이 영화는 내부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외부 세계는 위험하다는 공포의 환상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면서 얻게 되는 안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트루먼 쇼>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흥미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킨다. 트루먼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처럼 꾸며진 TV세트장 내에서 살아서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진짜라고 믿고 산다. 그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생방송으로 대중들에게 중계된다. 트루먼은 꾸며진 세상에서 별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뭔가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 세트장 밖에 진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에 분노한다.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경험과 역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며 자신만 빼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이다. 트루먼은 무의 세계로 추락해 어른의 몸을 하고서 탄생부터 자신의 인생사를 다시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트루먼이 진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금기를 깼기 때문이다. 바다로 나가서 끝까지 가다보면 죽게 된다는 경고를 어기고 노를 저어 끝까지 간다. 그렇게 간 바다의 끝에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었다. 프로그램 제작자는 오히려 바깥 세상이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이며 트루먼이 사는 세상은 깨끗하고 진실되고 안전한 곳이라고 주장한다. 깨끗한 세상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안전성을 인식시키려든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거대한 거짓이 된다.

 

   영화 <푸른 수염>에서 백작에게 시집을 온 소녀들은 모두 하나같이 빨간 알약을 택한 셈이다. 백작이 절대 열면 안 된다고 금지한 방 한 개의 문을 열지 않고는 못 배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문을 연 신부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 마지막으로 결혼한 신부는 목숨이 위협 당하자 반대로 백작의 목을 쳐 죽인다. 금기라는 경계선이 제거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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