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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Mar 29. 2018

그들은 정말로 사랑했을까 <팬텀 스레드>

사랑이라는 피부의 또 다른 이야기

  집근처 영화관에서 하루에 한 차례밖에  상영하지 않는 귀한 영화, <팬텀 스레드>를 드디어 보았다.  예쁜 옷들을 실컷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고 입는 옷은 유령의 피부였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정체성을 영화는 이런 식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에 대해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 규정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인간들 사이에 그런 감정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 한 순간의 미몽에 불과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팬텀 스레드>는 사랑이라는 모호함을 이번에는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라질만하면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것.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사랑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사랑이라고 믿는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팬텀 스레드>에서는 어머니의 유령을 끌어안고 사는 병든 남자와 그 유령의 자리를 자신의 실체로 대신하고 싶은 집요한 욕망을 가진 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오프닝 씬에서 알마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레이놀즈는 제꿈을 이뤄줬고 나는 그가 가장 열망하는 것을 주었지요."


  조그만한 변화에도 흩뜨러지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레이놀즈는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지탱한다. 그 집에는 수많은 재단사들과 누나가 있다. 그들은 아침마다 규칙적인 일과로 시작한다. 그들의 세상은 앞으로도 전혀 변화가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레이놀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이 어떤 유행을 따르건 그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환상을 채워줄 여자의 자리만 있을 뿐, 그 자리에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해도 레이놀즈에게는 상관이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딴지를 거는 여자는 레이놀즈가 세워놓은 질서의 세상에서 튕겨져나가길 자처하는 사람일 뿐이다.

  누나도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가 생길 여지도 없다. 늘 반복되는 것은 안정된 것같은 착각을 준다. 그래서 그것을 안정감이라고 믿고 살고 싶어한다.


  레이놀즈에게 드레스는 허물어지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피부와도 같다. 레이놀즈는 자신이 만든 피부 속에 은밀한 글귀를 넣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죽은 엄마가 늘 자신 곁에 있다는 환상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 나간다.  엄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는 자신을 떠나야만 하거만 늘 자신 곁에 머문다. 웨딩드레스는 변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변화를 거부하는 그는 정작 자신은 웨딩드레스를 입기를 거부한다.

  또한 드레스는 여자들에게 또 다른 피부다. 멋진 피부는 여자에게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음을 확인해준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지켜준다.


  다른 여성들처럼 레이놀즈의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던 알마 역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이 영화 속에서는 그 위기가 두 번 나온다.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를 선물받고 짐을 싸는 대신 알마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소량의 독버섯을 갈아넣어 레이놀즈에게 극도의 불안감과 죽음의 공포를 선사하는 방법이다. 첫번째는 레이놀즈가 알지 못하게, 두번째는 레이놀즈한테 보란 듯이 그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 첫번째는 레이놀즈가 선택하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두번째는 그에게 선택권을 준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좀더 강력한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들과의 차이라면 알마는 레이놀즈가 지니고 있는 불안감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이 통할 것을 알고 있었다.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 독은 선물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설사 레이놀즈가 그로 인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옳은 선택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은 레이놀즈이고 레이놀즈를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레이놀즈 역시 알마의 계략을 눈치채고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사랑 놀이는 기묘하게 마무리된다.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는 것이 사랑의 의미라면, 상대방의 결핍을 해석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결핍을 메워주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의 의미라면, 그들의 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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