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walk - Jul. 25. 2025

한여름 밤의 산책 그리고 지나가는 생각들

by Yameh

이것은 아무런 목적 의식이 없는 글이다. 왜냐하면 글의 목적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2025년 7월 25일 저녁 약 두 시간의 저녁 산책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재미도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걷는 두 시간 동안 내 생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다.


8시 3분 집을 나선다. 현재 온도는 31도, 습도는 65%라고 나온다. 해가 지고 난 직후라 그런지 30도가 넘는 온도에 비해 선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최근에 35도가 넘어가도 내가 덥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 몸에 이상이 생겼나 아니면 원래 이게 정상인건가. 지금까지 내가 비정상인 상태로 살아왔나. 예전 같으면 30도만 넘어도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연신 물을 들이켜는 게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은데…. 러닝으로 살을 10킬로 이상 빼면 몸에 이런 변화가 오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덤으로 얻은 건 수족 냉증. 살이 빠지고 수족냉증이 와 조금만 찬 바람이 불어도 손이 곱아서 얼음장 같이 차가워지고 젓가락질을 하지 못 할 정도로 굳어버려서 바깥에 있다가 밥 먹으러 들어가면 음식이 나왔을 때 제대로 젓가락질을 하지 못해 손이 녹을 때까지 따뜻한 밥그릇에 손을 올려놓고 손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손이 녹아야 그때부터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밥이 나왔는데 밥은 안 먹고 밥공기에 손을 올리고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얼마나 그 모양이 이상했는지 서빙하시는 분이 음식에 어디 문제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참 모양새가 민망했다.


어쨌든 온도가 높고 습한 것 같긴 하지만 생각보다 선선한 날씨라고 생각하고 걷기 시작한다.

혼자 걸을 땐 덜 지루하게 음악을 듣는다. 걸으면서 무엇을 들을까 생각한다. 먼저 유튜브 뮤직에서 Survivor의 I can’t hold back을 듣는다. 그런데 오늘 산책에 딱히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가 언제 그런 걸 따졌지? 그런데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은 유튜브 뮤직 말고 아이튠스에서 음악을 찾아볼까 한다. 클래식을 들으면 더위가 덜할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한다. 물론 선선하다고 느끼면서 더위가 덜한 걸 찾는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여름 밤의 클래식을 듣는 음악회도 있는데 그 느낌을 가져보고 싶어 클래식을 뒤져본다. 그중에서도 여름과 관련된 클래식이 뭐가 있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멘델스존인가? 바흐인가? 멘델스존은 클라라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출중해 괴로워했다던데. 클라라 멘델스존… 생각해보니 클라라 멘델스존이라는 음악가는 없다. 클라라 슈만이겠지. 음악 안 들은 지 오래되니 멘델스존과 슈만도 헷갈리는구나. 그래 오늘은 딱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 제격이겠다는 생각에 보스턴 필하모니가 연주한 한여름 밤의 꿈을 재생한다.


길을 건너는 횡단보도에서 음악을 검색하고 있으니 왜 사람들이 길을 건너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지? 저건 옳지 않다고 항상 훈계를 하고 싶어지는 내 자신이 약간 부끄럽다. 나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러는 사이 overture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한여름 밤의 꿈을 들으면 더위가 물러날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느끼는 온도는 그대로다. 이건 내가 기대한 바가 아니다. 계속 끝까지 들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음악으로 바꿀 것인가? 대략 트랙 5까지 왔는데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할 때 갈림길까지 왔다. 직진할 것인가, 우회전해서 고속도로 옆 산책로로 갈 것인가? 산책로에는 흙과 자갈이 있어 틀림없이 신발에 자갈이 들어갈 것이고 이건 매우 성가신 일이므로 그냥 직진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직진하면서 계속 들을지 말지를 생각한다. 내가 들으려고 한 건 이 느낌이 아니야. 내가 생각한 건 멘델스존보다는 슈만에 가까웠어,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면서 재빨리 슈만을 검색한다. 내가 집을 나서면서 처음 생각했던 건 아마 슈만의 어린이 정경(kinderszenen)이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나온 지 벌써 1.5킬로가 넘어가는 시점에 다시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다시 듣기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슈만의 Fantasie in C, Faschingsschwank aus Wien & Papillons를 듣는다. 그래 차라리 슈만의 환상곡이 한여름 밤의 꿈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듣다 보면 연주자의 터치감이 익숙하다. 이건 내가 아는 연주자라는 의미이다. 리히터네… 라고 생각하면서 횡단보도 앞에서 연주자를 확인한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내가 존경하는 좋아하는 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터치이다. 다른 연주자는 몰라도 리히터나 우고르스키, 폴리니 정도는 이제 구분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마 호로비츠가 식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2킬로가 지났다는 걸 알려준다. 1-2킬로 구간 13분 23초.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네.. 엉덩이에 또 통증이 밀려온다. 걷기에 약간 지장이 생긴다. 이럴 땐 몸을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펴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허리와 엉덩이에 통증이 덜 간다는 생각에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운다. 오후에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한의원에 갔는데 (물론 나는 나의 문제가 뭔지 알고 있다. 그것은 Sciatica이다) 침과 추나 요법을 받아서 약간 통증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는데 2킬로 정도를 걸어서 그런지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오기 시작한다.


사실 이건 통증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허리 디스크가 심할 때 겪은 통증과 이 통증은 확연히 다르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생긴 통증은 찌르는 듯한 통증인데 이건 그냥 아주 기분 더러운 묵직함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이걸 더러운 묵직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나는 한의원에 가서 원래 어디가 안 좋았냐는 한의사 분의 질문에 Sciatica가 있다고 말했을까. 그리고 Piriformis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의사도 아니고 신체를 연구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Sciatica나 Piriformis라고 답했을까. 대답을 하고도 스스로 무안했다. 우리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말은 사투리로 하는데 왜 이건 영어로 답했을까. 생각해보니 좌골신경통이라는 말을 알기 전에 Sciatica라는 말을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Piriformis는 한국말 단어를 아예 몰랐다. 이상근? 이성근? 이수근? 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인지 어느 부위인지 몰랐다. 이상근이 내가 알고 있는 Piriformis였다.

집에 와서 스트레칭 방법을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야 하려고 하는데 이상근이 생각나지 않아 또 Piriformis로 검색했더니 역시 영어로 된 콘텐츠만 나왔다. 당연히 유튜브는 Piriformis를 검색하면 영어로 된 콘텐츠를 찾아주겠지.. 근데 왜 이상근이라는 쉬운 말이 생각나지 않을까. 이상근은 1박 2일에 나왔던 귀여운 그레이트 피레니즈 상근이와 이수근을 합쳐 놓았다 생각하면 외우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 상근이는 이제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이 세상에 없지. 그곳에서도 귀염 많이 받아라. 노년에 아파서 고생 많이 했다고 지상렬씨가 이야기하던데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아라.


어쨌든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우고 걸으려고 노력하면서 걷는다. 걷는 동안 땀이 나긴 한다. 선선하다고 생각했지만 운동하면 몸 안에서 배출될 건 배출되긴 한다. 입고 있는 티셔츠는 생각보다 많이 젖지 않았다. 20퍼센트 정도?


어느덧 3킬로미터가 됐다고 알림이 온다. 13분 18초. 큰 길 바로 뒤의 늘 다니는 한가한 골목길로 접어들어 걸어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빨간 뉴비틀이 한 대 서있다. 2000년 초반 뉴비틀 귀엽다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요새는 보기 힘들어 진 녀석인데 아직도 누군가 이걸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네. 무단 주차까지 하면서.

뉴비틀을 보니 갑자기 맨디 무어가 생각난다. 맨디 무어가 ‘Candy’ 뮤직 비디오에서 뉴비틀 차들을 세워두고 그 앞에서 춤추면서 노래를 했었지. 그때는 맨디 무어 엄청 날씬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맨디 무어 어떻게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직도 노래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구글 검색하면 다 나오겠지. 그런데 굳이 검색하고 싶지 않다.

맨디 무어가 인기 있던 그 시절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맨디 무어의 위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나름 인지도도 있고 잘 나가려는 찰나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나타나면서 거기에 휩쓸려 사라졌나? 어쨌든 맨디 무어 지금은 어디서 뭐하는지 갑자기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Haley Williams의 근황도 궁금하네. 내가 신경을 안 쓰는 사이 다들 잘 살고 있겠지 뭐. 연예인 걱정은 할 필요 없는 거라더라.


저 횡단보도는 왜 나한테 한 번도 바로 건너갈 기회를 주지 않을까. 왜 항상 나는 이 횡단보도 앞에서 서서 항상 2분씩 기다려야 할까. 그러는 사이 티셔츠는 아까보다 더 젖었다. 35퍼센트 정도.

아까 낮에 전화 온 후배는 오랜만에, 그러니까, 거의 3년 만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왜 팔란티어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팔란티어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데 팔란티어의 AI 운영 방법론을 눈여겨보라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AIP가 어쩌구… 그런데 팔란티어 이야기를 하면서 온톨로지 이야기는 왜 하지 않았을까. AIP까지 이야기하려면 온톨로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가끔 내 생각을 그 녀석도 하긴 하나 보네.


4킬로미터를 알린다. 14분 40초. 엉덩이가 뻣뻣하니 빨리 걸을 수 없으니 시속 4킬로에 근접하는 속도로 걷고 있다. 이건 운동인가 그냥 산책인가. 왜 이러고 있지?

어쨌든 오늘도 산책 코스는 늘 가던 코스로 간다. 그러면 밑에 사거리에서 다시 트랙이 있는 운동장으로 간다. 엉덩이 상태가 나쁘지 않으면 트랙에서 다섯 바퀴나 열 바퀴 돌겠지만 오늘은 엉덩이 컨디션을 고려해 세 바퀴만 돌아야겠다. 그러는 사이 리히터의 연주는 끝났네. 더 이상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걸을 때 클래식을 들으면 앨범 단위로 듣게 돼서 잡생각이 덜 난다. 그냥 음악만 듣던가 음악만 들려올 뿐이다. 그런데 팝이나 가요를 들으면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별생각 없이 걸어왔으니 이제는 리히터의 연주를 뒤로하고 다시 지나간 시절의 노래를 듣는다. Survivor가 다시 나오고 Van Halen, Def Leppard가 연달아 나온다. 이 사람들은 어떤 축복을 받았길래 이런 곡들을 만들고 연주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 Tears for Fears가 나온다.

그러는 사이 횡단보도에 도착했다. 이 횡단보도에만 오면 항상 이상하게 Maureen McGovern의 ‘Morning After’가 생각난다. Poseidon Adventure 주제곡인데 왜 이 노래는 이 횡단보도에만 오면 생각날까. 그런데 눈앞에 간판에 Bar 매크번이 있다. 매크번 바 앞을 지나다녀서 맨날 모린 맥거번이 생각났나? 근데 매크번 바가 있다는 건 오늘 처음 봤는데 희한한 일이네. 왜 저 바의 주인은 쉬운 이름을 두고 매크번 바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모객에 별로 좋은 네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


5킬로미터를 알린다. 14분 02초. 이제 이 골목만 지나면 트랙이다. 지금 시간은 9시가 넘었다. 오늘도 다른 날같이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날이 더워서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10시에 공식적으로 문을 닫으니 뒷문으로 나오려면 어쨌든 10시 전에는 나와야 한다.

이제 트랙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는 5.22킬로미터. 생각한 대로 두 바퀴만 돌고 가자.


첫 바퀴

항상 걷기의 시작은 크랙이 있는 곳부터 측정한다. 오늘도 슬로우 러닝 클럽의 강습이 있나 보다. 해 지기 전에 시작하던데 오늘 이 시간까지 있는 걸 보니 늦게 시작한 모양이다. 그들의 모습은 여느 러닝 크루와는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 슬로우 러닝이다 보니 러닝 멤버들이 나이 든 분들이 많다. 강사분만 화려한 러닝 복장이고 회원분들은 긴 바지에 반팔 셔츠를 보통 입고 있다. 그리고 반팔 셔츠에는 인상적인 문구 즉 슬로건이 적혀있다. “느려도 괜찮아. 행복을 달려라” 그래 슬로우 러닝이니까 느려도 괜찮아. 느리게 달려도 행복하면 되지. 트랙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이 클럽의 회원들이 슬로우 러닝을 하는 걸 보면 다들 행복해 보이긴 한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사실 그들의 슬로우 러닝이 아니다. 그들의 슬로건이 나의 관심사이다. ”느려도 괜찮아. 행복을 달려라.“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It’s OK if you run slow, Run happily” “It’s OK to be slow, Run happiness”, “Slow is fine. Let’s run happiness”, “It’s OK to be slow. Run for happiness” 행복을 달린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생각해보니 모호하다. 행복을 위해 달리라는 것인지, 행복을 향해 달리라는 것인지, 행복하게 달리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걸 전부 다 포함하는 것인지. 이걸 아무 생각 없이 Run Happiness라고 하면 행복을 경영한다는 말이 되고 Run for Happiness라고 하면 행복을 위해 달리라는 말이 되고 Run Happily는 행복하게 달리라는 말이 되는데 이 슬로건을 만든 원래 원작자는 어떤 생각으로 만든 말일까. 물론 의미가 무엇이든 좋은 말이다. 행복하게 달리든, 행복을 위해 달리든, 행복을 향해 달리든 중요한 것은 느리게 달린다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다. 다만, 이 클럽의 활동을 영어로 알리기 위한 번역을 나에게 맡긴다면 추구하는 의미의 모호성으로 아마 나는 안 맡을 것 같다.


두 바퀴

두 바퀴째가 되니 발이 무겁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트레일 러닝화이다. 알트라 올림푸스 6이고 제로 드롭 러닝화이다. 무게는 320그램 정도 되는 것 같다. 매우 좋은 신발이지만 러닝화가 300그램을 넘어가면 발이 무겁다. 이전에 신던 올림푸스 5는 매우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었는데 올림푸스 6는 날렵해진 디자인과는 다르게 매우 묵직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러닝화는 가능하면 300그램을 넘지 않는 걸 사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200그램에 근접하거나 그것도 안 나가는 운동화는 매우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미드솔을 가볍게 만드는 게 기술력이니까 가벼운 데는 비용이 따른다. 왼쪽 엉덩이는 여전히 묵직하다. 계속 이상근 있는 쪽을 문질러줘야 한다. 두 바퀴를 걷다 보니 인사는 하지 않지만 트랙에서 자주 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다들 천천히 뛰고 있다.

6킬로미터, 13분 19초 알림이 온다. 이제 그만할까. 온 김에 한 바퀴만 더 하고 가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엉덩이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이미 무리한 거야. 그냥 하자.


세 바퀴

세 바퀴째가 되니 자주 보는 분이 눈에 들어온다. 항상 100미터 트랙을 어색한 걸음으로 뒤로 걷는 할아버지가 오늘도 나와서 언제나와 같이 뒤로 걷고 계신다. 느릿느릿 뒤로 걷는 게 저분은 필시 몸이 좋지 않아 재활을 위해 뒤로 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느릿느릿 걷다가 100미터 출발점에 서서 다시 100미터 종료선으로 걸어가는데 매우 빠르게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걸음으로 걸어간다. 재활을 하시는 게 아니었나? 엄청 빨리 걸으시는데 뒤로 걷는 모습은 왜 마치 뇌경색을 한 번 겪은 분처럼 매우 어색하게 느릿느릿 걸으시는 거지? 그 할아버지의 걷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다. 약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다. 뒤로 걷는 모습은 어색하고, clumsy한 모습이더라도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행복을 걷는 거야. 달리는 사람들 중에 모자를 쓰는 사람도 있고 모자를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땀이 많이 눈에 안 들어가게 하려고 모자를 쓰는데 모자를 안 쓰는 사람들은 땀이 안 나서 그런가 아니면 예전의 나처럼 모자를 쓰면 장점이 있다는 걸 몰라서 그런 걸까. 그런데 가끔 모자를 쓴 사람들 중에 남자고 여자고 모자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저기 달려가는 저분도 모자 핏이 기가 막히네. 모자 핏이 기가 막히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지? 나 같은 대두는 일단 탈락, 너무 소두도 탈락, 적절한 두상 크기에 예쁜 두상을 갖춰야 하고 갸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모자 옆으로 얼굴이 튀어나오지 않고 모자를 썼을 때 모자 위로 귀가 살짝 나와야 하는 것이 조건인가. 어쨌든 오늘 모자 핏이 기가 막힌 사람은 이 트랙 위에 두 명이다. 네 바퀴를 돌면 허리가 더 아플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간다.


트랙을 돌고 나면 이유 없이 목이 마르다. 물론 이유가 있을 때도 있다. 엄청난 수분을 빼내서 갈증이 나면 목이 마른데 오늘은 엉덩이가 아파서 신경이 곤두선 채로 걸어서 그런가 트랙을 돌고 나오니 갈증이 밀려온다. 그런데 갈증이 밀려오면 물이 마시고 싶거나 아니면 보리차가 마시고 싶은데 오늘은 난데없이 콜라가 마시고 싶다. 그것도 펩시콜라 제로 라임. 갈증이 밀려왔다기보다는 그냥 펩시콜라 라임 제로가 먹고 싶은 상태일 뿐인 모양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편의점으로 간다. 펩시콜라 제로 라임은 1+1이다. 나름 횡재다. 1개 2,600원인데 2개 2,600원으로 살 수 있다. 의기양양하게 두 개를 들고 나오면서 바로 하나를 열어 마시기 시작한다. 탄산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들어가니 엄청난 트림이 밀려온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다. 마음껏 트림을 한다. 한 달에 한 번도 안 먹던 콜라, 특히 펩시콜라 제로 라임을 격일로 먹지? 생각해보니 유튜브의 어느 과학 콘텐츠에서 화학 교수님이 자기는 제로 콜라를 먹는다고 했다. 제로 콜라가 탄산이 더 세다고 하던 이야기를 들으니 호기심에 콜라가 마시고 싶어졌고 그때 이 펩시콜라 제로 라임을 먹어본 이후 격일로 마시고 있다.


콜라 원리주의 원칙 즉, 콜라는 설탕이 가미된 콜라가 제 맛이며, 제로 콜라는 콜라의 탈을 쓴 설탕물이며 콜라라는 것은 원형 그대로의 레시피를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콜라라는 말도 안 되는 원칙으로 나 혼자 항상 하는 생각이다. 어릴 때 코카콜라 1리터 병이 처음 나왔을 때 그때 사람들이 코카콜라 맛이 변했다고 했다. 1리터가 되면서 원래 300미리 병 콜라의 맛이 아니게 됐다고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러다가 1.5리터 페트병이 나왔다. 페트병에 든 콜라를 마신 사람들은 페트병에 든 콜라는 콜라가 아니라고 했다. 제로 콜라가 나왔다. 진짜 정제 설탕이 안 들어간 콜라는 콜라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지금 먹는 이건 뭐지? 갑자기 어릴 때 한때 유행했던 펩시 챌린지가 떠오른다. 눈을 가리고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를 마시게 하고 어떤 것이 펩시콜라냐는 걸 물어보고 펩시 콜라를 맞추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인데, 실제로 펩시 콜라를 찾아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목격한 대부분은 코카콜라를 선택했다. 둘은 분명 차이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코카콜라는 펩시콜라라고 했다.

이에 코카콜라도 맞불을 놓기 위해 대응하는 챌린지를 했고, 거기에다 펩시에게 일격을 가할 비장의 무기를 만들었지. 이름하여 코카콜라 요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집집마다 코카콜라 로고나 환타 로고가 그려진 요요가 없는 집에 없었다. 물론 나도 코카콜라 요요가 있었지. 강아지 산책, 트라이앵글인지 시계인지를 한다고 맨날 요요 연습도 했었는데… 이제 더 이상은 요요는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디스’하는 챌린지를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가 아니고 그냥 모르겠다.


7킬로미터 13분 39초 알림이 온다. 음악은 계속 듣고 있는데 뭐가 나온지 모르겠다. 콜라에 대한 생각에 빠져서 뭐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사이 귀에 익은 곡이 다시 들어온다. Mike + The Mechanics의 ‘All I Need is A Miracle’. 가사가 들리는데…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있고 싶으면 있으라 했다. 너가 하는 일이 절대 맞을 리 없다는 걸 안다… 그런데 내게 필요한 건 기적이야. 내게 필요한 건 너야. 뭔 소리야? 마이크 형님 이렇게 찌질한 사람이었어? I’m gonna miss you for the rest of my life. I’m gonna miss you for the rest of your life.

All I need is a miracle.. 참.. 나한테도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 기적은 마이크 형님이 생각하는 기적과는 참 사뭇 다르네. 어쨌든 기적이 필요하긴 해.


집이 가까워오니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8킬로미터 14분 32초 알림이 온다. 오늘 밤에는 통증 때문에 잠들기 힘들까 힘들지 않을까. 아파서 온몸을 비비꼬면서 잠들지 말고 그냥 통증 없이 바로 누워서 잠들면 참 좋겠다. 유튜브에 Piriformis가 됐든 Sciatica가 됐든 이상근이 됐든 좌골 신경통이 됐든 나와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내가 희귀한 편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이 된다. 나와 같은 문제로 잠들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다들 오늘 저녁은 편히 잠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느덧 집 앞.

총 시간: 1시간 59분 31초 총거리: 8.48 KM 셔츠는 80퍼센트 정도 젖었네.

이제 잡생각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서 씻고 편히 잠들 궁리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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