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아나운서, 배우이자 스포츠 캐스터
지난번 <Night Walk>에 대한 글을 쓸 때 들었던 Mike and the Mechanics의 ‘All I Need Is A Miracle’.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니, 놀랍게도 그 순간이 명확하게 기억났다. 나는 지역 MBC의 두시의 데이트에서 처음으로 이 곡을 접했다.
때는 1986년 늦봄 혹은 초여름, 내가 중학생이었던 시절이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FM 라디오를 듣는 것은 소중한 일과 중 하나였다. 당시 주말의 황금 시간대는 단연 ‘차트 방송’의 차지였다. 빌보드 차트가 발표되고 순위에 오른 곡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시간이었다. 내 기억 속 80년대의 FM 채널은 KBS와 MBC가 양대 산맥이었고, 그 틈새에 AFKN 라디오가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지방이었기에 서울의 라디오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추측하기로는, 일요일 오후 2시에는 KBS 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이 금주 빌보드 차트를 소개했고, 토요일 비슷한 시간대에는 MBC FM에서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가, 오후 늦게는 AFKN에서 케이시 케이즘(Casey Kasem)의 ‘American Top 40’가 방송되었을 것이다. 유행에 민감한 청취자들은 '금주 차트'를 들을 수 있는 김광한의 방송을 가장 손꼽아 기다렸고,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가 송출되지 않았다. 대신 같은 시간에, 같은 이름으로 지역 MBC에서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그 프로그램의 DJ가 바로 신중섭 아나운서였다. 그의 방송 경력이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직접 여쭤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사투리 하나 섞이지 않은 세련된 말투와 품격 있는 멘트는 어린 내게 무척 인상 깊었다. 한동안 나는 전국의 <두시의 데이트>는 모두 신중섭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야 서울과 지역 방송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배신감마저 느꼈지만, 그의 진행이 워낙 훌륭했기에 서울 방송이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 내내 라디오로 빌보드 차트를 들었던 덕에, 나는 당시 인기 있던 노래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때의 빌보드 차트 대부분을 지금도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에 각인된 기억은 이토록 오래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유별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배경 설명이 길었지만, 이 글의 주인공은 신중섭 아나운서다. 그는 당시 지역 MBC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저녁 뉴스 앵커로 뉴스를 전하다가도, 라디오 부스에서는 감미로운 DJ가 되었고, 심지어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한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한 번은 어머니께 “저분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뉴스에도 나오고, 라디오에도 나오고, 연속극에도 나와요?” 하고 여쭌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지역 내에서 인지도가 높았고,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만능 방송인’이었던 셈이다.
그러다 80년대 중반, 서울 MBC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김보경 아나운서가 결혼과 함께 지역 MBC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있었다. 신중섭, 김보경 두 사람이 함께 진행하는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지역 방송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세련된 기운이 넘쳤다. 반대로 두 사람이 빠진 프로그램은 평범한 ‘지방 방송’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역량 있는 진행자가 방송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때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신중섭 아나운서는 80년대 내내 지역 방송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지역 MBC에서 보이지 않았다. 90년대 초 SBS가 개국했고, 나 또한 서울로 올라왔을 때였다. 개국 초기 SBS는 라인업이 채 갖춰지지 않아 탤런트가 앵커를 맡기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우연히 TV를 보다 SBS에 출연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수준 높은 지역 방송은 누가 만드나’ 하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이후 SBS에서 그의 역할을 관심 있게 지켜보니 주로 스포츠 캐스터로 활동하는 듯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SBS 스포츠국 부국장을 역임했고, 특히 배드민턴 전문 캐스터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정년 퇴임 후에는 배드민턴 브랜드 ‘빅터코리아’의 대표이사로 부임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시작과 대중에게 알려진 그의 인생 행적이 사뭇 달라, 그의 지역 방송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는 나로서는 때때로 기억과 현실의 간극에서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곤 한다.
어찌 되었든, 신중섭 아나운서는 내게 Mike and the Mechanics의 ‘All I Need Is A Miracle’, George Michael의 ‘A Different Corner’, Nu Shooz의 ‘I Can't Wait’ 같은 명곡을 알려준 고마운 분임에 틀림없다.
또 스포츠 캐스터로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그가 한때는 DJ였고 배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
그가 늘 행복하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