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이런 사고실험을 한다.
5만 년 전의 사피엔스를 현재 교실로 데려온다면 어떨까?
칠판 앞에 앉혀 미분과 적분을 가르치고,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한다면 그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핵심적인 조건이 하나 있다.
어떤 사피엔스를 데려올 것인가.
이미 부족 사회의 언어와 규범 속에서 사회화된 성인이라면, 곧바로 현대 과학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화적 틀이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어린 사피엔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대의 언어와 기호, 교육 체계 속에서 성장한다면 그는 오늘날의 아이들처럼 수학을 배우고, 나아가 양자역학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은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 고고인류학에 따르면 약 30만 년 전 사피엔스의 뇌 용적은 이미 현대인과 비슷한 1,300~1,500cc에 도달했고, 구조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런던 UCL의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의 뇌가 사회적 관계 유지에 필요한 크기('던바의 수', 약 150명)에 도달한 이후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더 큰 뇌는 출산과 에너지 소비에서 불리했기 때문이다. 즉, 뇌는 이미 그때 완성 단계에 도달했고, 이후 물리적 진화는 정체했다.
그렇다면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 뇌가 아니라 뇌 바깥, 곧 외부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은 글쓰기를 "외부 기억"이라 불렀다. 인간은 정보를 뇌에만 저장하지 않고, 언어와 기호를 통해 바깥에 기록하고 다시 불러오는 방식을 발명했다. 하버드의 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는 이를 트랜스액티브 메모리(Transactive Memory)라 명명했다. 그의 실험에 따르면 부부나 팀은 기억을 역할에 따라 분산 저장하고 서로를 '기억의 검색 엔진'처럼 활용한다. 혼자서는 떠올리지 못하던 정보도, 관계 속에서는 쉽게 호출된다. 이는 집단 차원의 지능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외부 수단이 인간 지능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언어는 추상적 사고와 협업을 가능케 했다. 쇼베 동굴(약 3만 5천 년 전)의 벽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공유된 상징"의 증거였다.
문자는 세대를 넘나드는 지식 전승을 실현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그 시작이었다.
인쇄술은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했고,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빠르게 퍼뜨렸다. 지식은 더 이상 소수의 머리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의 자산이 되었다.
인터넷은 집단 지능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1990년대 위키피디아 같은 실험은 "한 개인이 아는 것"보다 "네트워크가 기억하는 것"의 힘을 보여주었다. MIT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세대는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디서 찾는가"를 아는 능력에 더 익숙해졌다.
즉, 인간 지능의 진화는 뇌의 구조 변화가 아니라 외부 수단의 진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이 흐름을 극적으로 가속화한다. 우리는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는 대신, 대화하듯 질문을 던진다. AI는 수십억 건의 데이터를 종합해 즉시 답을 제시한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백신이 불과 1년 만에 개발된 과정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실시간 공유했고, AI 모델은 후보 물질을 분석해 탐색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옥스퍼드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이를 '초집단 지성(Super-collective Intelligence)'이라 불렀다. 개인의 뇌로는 불가능한 통찰을, 집단과 기계가 결합해 만들어낸 것이다.
더 급진적인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 엘론 머스크의 뉴럴링크(Neuralink)는 원숭이에게 뇌 칩을 이식해 게임을 조작하게 했고, 최근에는 인간 대상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MIT 미디어랩의 연구는 뇌-기계 인터페이스(BMI)가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보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외부 수단은 이제 단순한 도구를 넘어, 뇌와 직접 연결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 변화는 심각한 사회적 파장을 낳는다. 하버드의 사회학자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는 『감시 자본주의의 시대』에서 데이터 독점이 곧 지적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했다. 외부 수단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격차는 단순한 교육 격차를 넘어, 존재론적 격차로 고착될 수 있다.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뇌와 기계가 결합하는 시대에 인간 의식의 경계가 어떻게 재정의될지를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하게 될까?
그러나 지능과 창의성은 동일하지 않다. 뇌가 정체해도, 창의성은 정체하지 않는다.
하버드의 테레사 아마빌레(Teresa Amabile)는 창의성을 지식 × 사고 기술 × 내적 동기의 곱으로 정의했다. 이는 창의성이 단순히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MIT의 뇌영상 연구는 창의적 사고를 할 때 자유로운 연상 네트워크(DMN)와 집중적 실행 네트워크(ECN)가 동시에 활성화됨을 보여주었다. 서로 상충할 것 같은 회로가 동시에 작동할 때 새로운 연결이 탄생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창의성은 언제나 제약과 새로운 연결 속에서 나타났다. 인쇄술은 예술과 과학의 폭발을 촉발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루터가 "왜 교회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디지털 아트를 탄생시켰지만, 그것을 발전시킨 것은 낯선 매체를 자신만의 문법으로 변환하려는 인간의 상상력이었다.
AI가 기존 양식을 빠르게 재생산하는 시대일수록, 인간 창의성의 본질은 더욱 선명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연결하고,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
호모 사피엔스의 뇌는 5만 년 동안 정체해 있었다. 그러나 지능은 멈추지 않았다. 언어와 문자, 인쇄술과 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뇌의 바깥에서 지능을 확장시켜 왔다. 이제 그 외부 수단은 뇌와 직접 연결되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그럼에도 창의성만큼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뇌는 정체했지만, 창의성은 정체하지 않는다. 진화의 다음 단계는 자연이 아니라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선택의 순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연결을 창조하며 창의성을 발휘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되묻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를 이해할 수 있는가?
아마도 완벽하게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묻고, 새롭게 연결하는 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조금씩 더 깊이 이해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