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돈을 보내셨다. 관리비를 내느라 온라인 뱅킹을 들어가 보니 아버지 성함으로 100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계좌에 찍힌 아버지 성함이 낯설고 또 의아했다.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해보니 아뿔싸 아들 월급의 1/3이 삭감된다는 소식을 들으셨단다. 아들 소식을 뉴스로 듣게 한 것도 죄송한데, 그 소식이라는 게 워낙 비참하여 고맙다는 말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아버지는 달큰하게 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러는 것도 얼마 안 갈끼다."
거기에 대고 차마
"아버지, 우리 다음 달도 무급휴직이래요."
토를 달지 못했다. "아빠 손자 맛난 거 먹일게요."라고 답하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지금의 회사에 입사해서 경제적 독립을 이뤄낸지 6년 만에 받아보는 아버지의 용돈이었다. 생일 때 며느리랑 맛난 거 사 먹으라고 주머니에 꽂아주던 선물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내라고 주시는 생계비였다. 혼자 식탁 앞에 앉아 막걸리 잔을 비워내실 아버지가 눈에 그려졌다. 그 앞에 마주 앉고만 싶었다.
할머니와 엄마 생신이 2-3월에 몰려있지만 한 번을 내려가지 못했다. 코로나의 근원지처럼 취급받는 TK에는 신천지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내 부모도 살고 있다. 낡은 집에 갇혀 객지의 아들, 딸, 손주 걱정을 날마다 빚어내며 살아 내고 있다. 할머니는 본인 생신에도 미역국만 두고 가라며 시골집에서 외부인의 접촉을 일절 피하셨다. 구십 가까운 생에 왜정, 전란, 가난, 독재까지 겪으신 분이 문을 걸어 잠글 만큼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끼들의 안위였다. 혹시나 본인 때문에 자식들이 병에 옮을까 고향 땅에는 발도 들이지 말라 하신다.
이맘 때면 내 고향 김천에는 벚꽃이 흐드러질 텐데. 언젠가 아내도 꼭 보고 싶다던 고향의 벚꽃을 올해는 아마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출퇴근 길에 보니 서울에도 골목골목 수줍게 벚꽃이 불그스름한 꽃봉오리를 머금었다. 거리는 휑하니 을씨년스럽고, 무채색 마스크가 계절 색을 감추고 있음에도 계절은 제 속도로 제 할 일을 기여코 해내고야 만다. 그러는 사이 뱃속의 아이는 세상 구경할 채비를 할 테다.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한다는데 태교는커녕 네 부모는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아내의 배에 손을 얹고 꼬물거리는 너를 느끼며 문득 네 아비의 아비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강개업쓰(관계없어)"
어려서 이건 이래서 걱정이고 저건 저래서 걱정이에요 하면 아버지는 늘 한결같이 말씀하시곤 했다. "강개업쓰." 아까 아버지와 통화할 때 그 말을 전할 걸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아부지. 아들, 강개업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