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성적표를 받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점수가 낮다. 회사 승격 심사에 필요해서 급하게 치긴 했지만 의외의 점수에 잠시 머리가 어질 하다. 어차피 올해 승격은 요원하지만 공동 육아의 의무를 저버리고 시험 전날 종일 문제집을 풀었던 노력이 허사가 된 것 같아 배신감마저 든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900점이 넘었던 건 생에 두 번 밖에 되지 않는다. 교환 학생을 마치고 난 직후와 입사 직후 단 두 번 나는 기록적인 점수를 맛보았다. 아마 그것이 나의 리즈시절이었나 보다. 그리고 6년 만에 만난 토익은 그간의 세월을 무시하지 않았다. 패인을 굳이 따지자면 다음과 같다.
1. 원래부터 나는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한다. 2.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나이를 무시 못한다. 3. 준비 기간이 타 응시자에 비해 너무 적었다. 4. 토익은 시험이고, 시험은 최근 출제 경향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5. 요즘 어린 친구들의 수준은 내가 그 또래였을 적 수준보다 훨씬 높다. 6. 고사장의 낡은 오디오 상태나 마스크로 인한 호흡 곤란 등은 구차하니 말하지 말자.
먼저 1번(원래부터 나는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한다)에 대한 이야기는 꽤 역사가 깊다.
나는 이래 봬도 서울의 4년제 영문학과 출신으로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어떤 경력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좀먹는 선입견을 만들기도 한다.
'영문과 = 영어를 잘한다'
라는 추론은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과 다르다. 영문과는 영어로 된 문학을 공부하는 학문으로 기능적으로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는 능력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읽는 능력을 요구하긴 하지만 오히려 16세기 영어에 더 능통하게 된다.) 이는 경영학과라고 경영을 다 잘하지 않는 것과 심리학과라고 다 인간 심리를 꿰뚫지는 못한다는 것 정도로 비유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Q. 영어도 못하는데 영문과는 뭐하러 들어갔는가?
사실 그 답은 위의 잘못된 추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단지 '영문과를 가면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현실은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영문과를 간다'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는 영어를 정말 잘하고 싶어서 영문과를 지원했으나 인과관계가 틀렸을 뿐이다.
Q. 그렇다면 나는 왜 영어를 그토록 못했는가?
시골 출신인 나는 같은 지역에서 12년 동안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선생님들 중에는 인상적인 분들이 많았지만(슬리퍼로 얼굴을 때리던 분이 생각난다.) 유독 영어 선생님들은 좀 더 특이했다. 한 예로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진도보다는 본인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더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교과서의 영어 지문을 칠판에 옮겨 적는데 수업 시간을 대부분 할애하셨다. 영어에 대한 나의 목마름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다음 2번(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나이를 무시 못한다.)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2020.10.10 토익 연령대별 평균 성적 from ETS. 이놈들 생각보다 잔인한 놈들이다.
주변의 과차장님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프로 확인하니 나이의 무게를 여실히 느낀다. 단순히 나이를 먹었다고 지능 지수가 내려간다기보다는 5번의 이유가 결합된 결과 이리라. 갈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그만큼 어린 친구들이 실력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제는 결국 내리막길인가. 하아...
그래도 나이 먹어 좋은 것도 있다. 잠시 어질 하긴 했지만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 어릴 땐 시험 점수 하나에 송두리째 흔들렸다. 마치 시험 점수가 나의 인생을 대변하는 양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며칠 씩 술 마시고 우울한 글이나 쓰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이깟 토익 점수 따위는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나의 행복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걸. 토익 점수야 어떻게 되든 나의 아들은 고개를 가누기 시작했고, 내 주위 사람 모두 코로나로부터 아직까지 안전하다. 정작 중요한 건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못 되는 토익 점수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 무얼 먹고살 것인지, 그러려면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들이 지금 시점에 내게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제야 말로 십여 년 간 품어왔던 영어 콤플렉스를 놓아주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해도 되지 않을까? 영어 성적 하나 받아 들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