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준호 Jul 29. 2018

21화. 멈춤의 미학

pause, 관성적인 말하기를 멈춰보자.

"계속 폐달을 돌려야 넘어지지 않지" 막내 아이에게 처음으로 자전거를 가르치던 날, 집앞 학교 운동장에서 막내아이 자전거의 뒤를 잡고 함께 뛰고 있었다. "아빠 넘어질 것 같아" 아이의 자전거 페달은 멈추면 넘어질세라 쉼없이 돌아가고, 나역시 땀이 송골송골 맺혀갈 정도로 자전거를 따라 뛰기 바빴다.

"아빠, 잘 잡고 있죠?" 앞만 보기 바쁜 아이가 연신 자신의 안전을 확인한다. "그럼" 아이를 안심시키는 말과 함께 내 발은 멈추고, 조금 불안하지만 손에서 자전거를 떠나보낸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전거를 가르칠 때 처럼 같이 뛰다 멈추고 떠나보내야 할 때가 생긴다. 내가 그렇게 부모의 곁을 떠나왔듯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해 월급이라는 것에 길들여지며 매월 월급으로 그 전달의 소비를 돌려막는 일종의 월급쟁이 관성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관성은 절대 월급이라는 것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며 늘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 되라는 말을 하는데, 이러한 관성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달리던 마라톤 선수가 멈추면 다시 달릴 수 없듯이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그 곳이 통신회사이든 증권유관기관이든 언론사이든 멈추면 뒤쳐지고, 낙오되며, 다시는 달릴 수 없을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여섯시에 일어나 출근하던 것을 멈췄고, 의미없이 차 한잔 하며 떨던 수다를 멈췄고, 한달에 한 번 정기 부서저녁자리도 멈췄다. 멈추고 나니 가족들의 아침이 보였고, 저녁이 보였다. 내가 보였고, 회사의 후광이 아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 하이킹 중

주역(周易)의 52번째 괘(卦)인 '중산간(重山艮)'은 첩첩이 쌓여 있는 형국을 뜻하는 것으로 '멈춤의 미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중후한 산이 겹쳐 있는 모습의 간괘에 대해 공자는 '간지야 시지즉지 시행즉행, 艮止也 時止則止 時行則行'이라 했는데, 이때 간은 그침이다. 공자는 그쳐야 할 때에는 멈추고, 일을 해야 할 때는 행동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의미하는 이퇴위진(以退爲進)이 있다. 이는 양보를 이용해 공격의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흔히 정치권에서 설전을 벌이다 한 발 양보하며 다른 것을 얻을 때 사용한다. 그렇기에 이퇴위진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앞으로 가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중의 많은 글쓰기 책들에서는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스피치라는 영역이 글쓰기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어서 이러한 책들이 분명 스피치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피치가 글쓰기와 크게 다른 점 하나는 멈춤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를 전문적 용어로 말이나 일하는 것을 잠시 멈추다라는 영어단어를 써서 ‘포즈(Pause)'라고 한다.  포즈는 문장과 문장에 쓰이기도 하고, 스피치를 시작하기 전 청중들과 눈을 마주치며 사용하기도 하며, 집중을 끌어낼 때 사용하기도 한다. 말을 멈추는 것이다. 이는 듣기 위해 말을 멈추는 것과는 또 달라서, 연설 중 포즈를 사용하게 되면 청중들도 함께 멈추게 된다. 글쓰기가 온전히 자기의 생각을 완성하고 상대에게 내 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피치는 청중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포즈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청중을 기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최순실 게이트를 시작으로 대통령 탄핵이 진행되던 2016년 11월 ,  민중총궐기 3차 촛불집회 중 청년유니온이 준비한 '만민공동회' 에서 마이크를 잡은 부산 사투리가 짙게 밴 아주머니의 외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공무원한테 속고, 시장한테 속고, 국회의원한테 속고, 장관한테 속고, 대통령한테 속았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속시원한 발언이었고, 아주머니가 잠시 호흡을 고르는 사이 나는 그 분의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정치인들한테 하도 놀아나서 그 곱던 얼굴이 이렇게 삭았습니다." 주변에서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몰아붙인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거짓말 안하는 사람. 우리 어려운 사람을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꼭 뽑으십시오." 마지막 거친 외침에 함께 있던 국민들은 힘찬 박수로 함께 했다.


스피치는 시간과 장소와 청중이라는 제약 조건들이 있다. 그래서 다시 고쳐쓸 수 있는 글과 달리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받기가 어렵다. 더욱이 눈으로 읽는 글과 달리 소리를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치의 핵심은 '전달'이다.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화해 줄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살피며 멈추는 '포즈(pause)'의 미학이 스피치를 더욱 빛나게 해 준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아 갔으면 한다.



스피치의 멈춤의 미학 'Pause, 포즈'는 청중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달리는 것을 멈추고 청중을 기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0화. 스피치 대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