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폐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글로벌 사모펀드가 한국 상장사에 수조 원을 베팅하는 진짜 이유

by Jason Han

2026년 초, 베인캐피탈이 에코마케팅을 약 5,000억 원에 공개매수했다. 뒤이어 EQT파트너스가 더존비즈온을 약 2조 2,000억 원에 사겠다고 나섰다. 코스피가 오르는 시장에서, 국내 사모펀드들이 규제 리스크를 이유로 손을 놓고 있는 사이, 글로벌 자본만 조용히 그리고 크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지분이 아니다. 상장폐지다. 돈을 더 써서 회사를 증시에서 빼내는 것이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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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사를 갖는다는 것의 피로>


사모펀드는 출자자(LP)에게 분기마다 성과를 보고한다. 상장사를 보유하면 주가가 그 성적표가 된다. 실적이 좋아도, 전략이 맞아도, 시장이 나쁜 날이면 주가는 떨어진다. LP에게 설명해야 하고, 다음 펀드 레이징에도 흔적을 남긴다. 상장폐지는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선택이다.

매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장사를 팔 때는 낮은 주가가 협상 테이블의 기준점이 된다. 한국 증시에서 형성된 가격이 딜의 출발선을 낮춰버린다. 반면 비상장사는 글로벌 PEF 시장에서 통용되는 EV/EBITDA 멀티플로 협상이 가능하다. 같은 회사가 어디에 등록되어 있느냐에 따라 받는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 이것이 한국 증시의 현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도구가 하나 있다. 유상감자다. 회사가 주주에게 현금을 지급하고 주식을 소각하는 것으로, 이익잉여금을 나누는 배당과 달리 자본 자체를 줄이는 행위다. 소수주주가 존재하는 상장사에서는 이해충돌 문제로 쉽게 할 수 없다. 하지만 100% 지분을 보유한 순간, 제약은 사라진다. 한앤컴퍼니는 루트로닉 상장폐지 후 불과 3개월 만에 유상감자로 3,800억 원을 회수했다. 이 자금은 곧 인수금융 차입금 상환으로 이어지고, 이자 비용이 줄고, IRR이 올라간다. 공개매수에 추가로 쓴 비용이 이 구조 하나로 돌아오는 셈이다.

공개매수는 추가 비용이 아니다. 통제권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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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가 오른다고 타깃 기업도 오르는 건 아니다>


코스피가 오르고 있다. 그런데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1년 후, PBR 1배 미만 코스피 상장사 비율은 66.7%에서 69.6%로 오히려 높아졌다. 랠리는 대형주 중심의 쏠림이었다. PEF가 실제로 들여다보는 미드캡 상장사 대부분은 여전히 저평가 상태로 남아 있다.

사모펀드는 세 단계의 갭을 본다.

한국 주가 < 기업 내재가치 < 글로벌 PE 시장 Exit 멀티플


ARR 기반의 ERP 기업인 더존비즈온은 글로벌 시장에서 SaaS 멀티플로 거래된다. 한국 증시에서 받는 가격과 다른 세계다. 에코마케팅은 주가가 전고점의 절반으로 내려온 타이밍에, 더존비즈온은 경영권 인수 후 빠른 비상장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각각 베팅했다. 배경은 다르지만 논리는 같다. 이 갭이 존재하는 한, 공개매수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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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가격을 올릴 수 있지만, 딜을 막을 수는 없다>

소액주주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5% 이상 지분을 모아 이사회에 개입하거나, 개정 상법의 이사 주주 충실의무 조항으로 소송을 걸거나. 에코마케팅 공개매수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은 ACT 플랫폼을 통해 5.86%를 결집했다. 하지만 딜이 무산된 경우는 없다.

저항이 거세지면 PEF는 가격을 올려 재시도한다. 신성통상 사례에서 13.3% 프리미엄으로 실패한 뒤, 30% 이상으로 재시도해 성공했다. 그리고 지분을 충분히 확보한 이후에는 주총 특별결의, 즉 현금 교부형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해 남은 주주를 강제로 내보낼 수 있다. 대주주라면 이 특별결의는 사실상 단독 통과다. 소액주주 저항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딜을 막는 것이 아니라, 공개매수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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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두르는 이유>


의무공개매수제 도입이 가시화되고 있다. 현재는 대주주 지분만 사면 된다. 소액주주에게는 같은 조건으로 공개매수할 의무가 없다. 이 제도가 바뀌면, 대주주에게 지급한 가격으로 나머지 주주 지분도 모두 사야 한다. 여야 모두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고, 민주당 안이 통과될 경우 필요 자금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베인캐피탈과 EQT가 지금 이 타이밍에 움직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규제가 바뀌기 전, 현행 구조에서 딜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국내 PEF들이 관망하는 사이, 글로벌 자본은 이미 계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