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물고기가 물었다.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물고기의 어미가 대답했다. "글쎄, 바다라는게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는다. 그러나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게 된다.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것이 죽음이다.
- 이 어 령. 2019.10.18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힌트를 찾았어요." "죽을 때 돌아가신다고 하죠. 그 말이 기가 막혀요.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다행인 건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죽음과 달리 관찰이 가능해요.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 전의 조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가요. 나는 그렇게 탄생을 파고들어요." 진화론자의 의견에 비추어보면 내 존재는 36억 년 원시의 바닷가에서 시작됐어요. 어찌 보면 과학은 환상적인 시죠. 내가 과거 물고기였을까, 양수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하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태아 형성 과정을 보면 아가미도 물갈퀴 자국도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그렇게 계산하면 내 나이는 사실 36억 플러스 여든일곱 살이지요. 엄청난 시간을 산 거죠. 죽음에 가까이 가고서야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36억년 전 어딘가에서 진화되어 현재의 '나'로 존재함을 죽음 앞에 이르러 탄생을 거슬러 생각해 보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는 선생. 그리고 '나'로 시작됨의 첫 존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였음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뱃속 세계를 몰랐어요. 태어난 후부터 트라우마를 적용했는데, 기실 태아 때 더 많은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걸 그는 몰랐지요.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사람들의 후손 중 많은 사람이 폐소 공포증을 앓았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유전은 내 조상의 정확한 이력서예요."
우리에게는 36억 년간 면면히 조상들의 삶을 기록한 유전자를 통해 나의 존재가 성립되고, 나 또한 인류의 유전자에 아주 미세한 기록을 남길 것이라고 선생은 말하고 있다.
"동양에선 덧없는 것을 꿈(夢)이라 하고 서양은 판타지를 꿈(Dream)이라 하죠. 나는 평생 빨리 깨고 싶은 악몽을 꿨어요.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빠져 외길을 걷는 꿈, 어릴 때 복도에서 신발을 잃고 울던 꿈, 맨발로 갈 수 없던 공포, 뛰려면 발은 안 떨어지고, 도망가보면 아무도 없는 험한 산길이었지요. 자기 삶의 어두운 면이 비치는 게 꿈이에요. 깨면 식은땀을 흘리고 다행이다 했어요. 그렇지만 현실에서 눈뜨고 꾸는 내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문학적 상상력, 미지를 향한 호기심…"
"나는 단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지는 않았어요. 미지에 대한 목마름, 도전이었어요. 여기를 파면 물이 나올까? 안 나올까? 호기심이 강했지요.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어요. 한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지 않으려고. 이제 그 마지막 우물인 죽음에 도달한 것이고."
처음부터 내 목숨은 빌린 거였어요.
바깥에서 저 멀리서 36억년의 시간이 쌓여 온 거죠.
뒤늦게 삶에 대해 깨달은 것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내 삶은 선물이었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선물이었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1)
이번 인터뷰가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라 했다. 선생은 현재 암 투병 중이다. 먼저 '돌아 간' 큰 딸 이민아 목사처럼 항암 치료는 받지 않는다. 대신 '제네럴리스트' 석학답게 죽음을 준비하며 죽음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선생이 전해 주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 대한 자세와 다름이 없다.
선생은 죽음 앞에 이르렀지만 아직 노화의 단계에 접어든 노인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젊은 스승이다. 오스카 니마이어 2) 처럼. 그는 끝없는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오래도록 우리의 젊은 스승으로서 곁에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
1) 조선닷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2019.10.19. 인터뷰 중에서
2)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1907-2012. 브라질의 건축가. 105세를 살며 타계 2년 전인 103세까지 현역 건축가로 활동했다. 그는 평소 노화의 기준을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으로 규정했다. 고로 그는 평생 노화를 겪지 않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