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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몰락…사라지는 공장과 떠나는 기술자들

by 장재준


공장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이따금씩 산업단지를 지날 때가 있다. 정확히는 예전엔 기계 소리와 사람으로 가득했던 그 곳. 어렸을 적 겨울이면 연기를 품어내던 그 굴뚝들이 즐비하던 공단 말이다. 어쩌다 경인고속도로라도 타는 날, 남동공단을 지날 때면 사람들로 넘치던 그 곳이 이젠 사람 보기가 힘들어지는 곳이 되고 있다. 수도권에서 먼 산업단지일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 남양주 테크노벨리나 김포 양촌산업단지는 수도권 산업단지인데도 마치 영화에서 보던 인류최후의 날이 지난 지구 한퀴퉁이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산업단지의 몰락은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간다. 이제는 불빛도 없고, 사람도 없다. 텅 빈 철문만이 드문드문 남아 있고, 그 너머엔 잡초가 자란다. 그곳엔 생산도, 소리도, 온기도 사라지고 있다.


rust belt.jpg (C) pxhere.com



한국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다. 상투적 표현이다. 이제는 누구나 안다. 그러나 정부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는 듯 하다.


2023년 제조업체 폐업 수는 1만271개로 전년(9449개) 대비 822개늘었다.1) 5인 미만 영세 제조업체는 더욱 심각하다. 2023년 무려 5만6천개가 감소했다.2) 2022년 대비 2023년 제조업 신규 창업비율도 약 10% 정도 줄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한때 자랑이었고, 한때는 믿음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국산 브랜드 마크를 보고 부모님은 안심하셨다. “이건 고장 안 나.”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은 곧, 한국 경제의 원동력이었다. 믿음을 만들던 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는다. 아니, 닫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없어진다. 미국으로, 베트남으로, 멕시코로, 안 보이는 곳으로 슬그머니 떠난다.


220억8438만달러. 우리 돈으로 31조 원.



지난해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직접투자한 금액이다. 1982년 당시 금성사(현 LG전자)가 미국에 550만달러를 들여 처음 TV 공장을 지은 이후 40여년 동안 무려 1,00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어느새 2,400여개에 이른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선 이후 투자 금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전망이다. 국내 기업들이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 투자, 구매를 하겠다고 발표한 금액만 540억달러(약 80조원)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028년까지 미국 시장에 210억달러, 우리 돈으로 31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2023년 우리나라 전체 민간 설비투자 금액인 100조원에 근접한 수치다.


현대차는 미국 조지아주에 짓는 신공장 생산능력을 연간 30만대에서 50만대로 늘린다. 기존 현대차 앨라배마주 공장(연간 36만대 생산)과 기아 조지아주 공장(34만대 생산)에서도 설비 투자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미국 현지 생산 120만대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지난해 현대차·기아 미국 판매량(170만8293대)의 70% 수준이다.

현대제철도 미국에 투자 보따리를 풀었다. 루이지애나주에 58억달러(약 8조5000억원)를 투자해 제철소를 짓는다. 원료부터 제품까지 일관 공정을 갖춘 미국 최초 전기로 일관제철소다. 2029년 완공해 연간 270만t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로써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철강에 부과되는 25% 관세 부과를 어느정도 모면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3)


삼성전자는 1996년 첫 착공 이후 현재까지 미국 오스틴에 총 180억 달러(약 26조원) 를 투자했으며 1978년 미국 진출 이래 미국 투자 금액은 470억 달러(약 67조원)를 넘어섰다.4) 그런데도 텍사스주 테일러시의 반도체 투자 규모를 440억 달러(약 59조 원) 늘리겠다고 한다.


80조, 59조, 숫자만 보면 눈이 핑 돌 지경이다. 미국에서 만드는 한국차, 미국에서 찍어내는 한국 철강. 미국에서 만드는 한국 반도체.. 무역확장법 232조? 관세 25%? 아무래도 좋다. 그나마 이건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다. 그동안 진행해 온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해외 투자 규모를 포함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삼성 하나만 봐도 베트남 최대 외국인 직접 투자자로, 베트남 내 4개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총 자본금은 220억 달러(약 30조 5,756억 원)에 이른다.5)


결국 그들이 피하고 싶은 건 세금이 아니라 손실이고, 지키고 싶은 건 주가다. 그리고 그 손실과 주가 사이에서 가장 먼저 포기되는 건, 이 땅의 노동자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공장은 해외에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다. 그 곳은 우리 땅이 아니니까. 그렇게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지역은 공동화된다. 철강도 자동차도, 반도체도 모기업이 나가면 협력사부터 무너진다. 김포에서, 남양주에서, 안산에서, 울산에서, 군산에서, 부산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나씩 하나씩, 줄줄이 끊어진다.


그래도 본사는 한국에 있잖아.



그 말이 위로가 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젠 본사가 어디 있든, 생산 기반과 일자리가 없으면 지역경제도, 국가 경제도 없는 시대다. 눈앞에서 무너지는 건 단지 공장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서 자란 기술, 흘린 땀, 축적된 노하우, 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기술은 사라지고 기술자도 떠난다. 남은 건 텅 빈 공장과, 전국의 산업단지다.


어쩌다 이렇게 되고 있을까.


제조업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들 한다. 플랫폼, AI, 바이오, 메타버스. 전부 미래다. 그러나 그 미래는 제조 산업 기반 없이 현실화 할 수 없다. 반도체를 설계하고, 쇠를 녹이고, 조립하고, 검수하는 그 일들이야말로 우리의 ‘현재’를 만든 일들 아닌가?


이 나라 경제가 글로벌 10위권까지 온 데는,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바다를 넘은 자동차와 철강과 전자와 화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이름 없는 중소 공장과 부품업체와 납품업체, 그리고 인생을 바친 수 많은 근면한 기술자들이 있었다.


이제라도, 늦기 전에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떠나는 기업을 잡으려 하기보다는 머무를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세금 감면이나 인건비 지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생산하고 연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되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둘째, 산업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미국 최우선주의 관세에 흔들릴 만큼 부실한 구조라면, 장기적으로 국내 생산 기반을 더욱 고도화해야 한다. 그리고 브랜딩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생산 인력 부족은 스마트 공장 지원 사업으로 해결하도록 국가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소부장 생태계를 진짜로 육성해야 한다. 상투적인 ‘R&D 예산’이 아니라, ‘사람이 남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공장은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 사람을 지켜야 한다. 재교육, 전환 배치, 산업별 전직 프로그램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으면, 떠난 공장은 슬픈 기념비가 된다. 산업이 바뀌더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누군가의 가장이자 국가를 지탱하는 국민이다.


넷째, 미국에 끌려가기만 하지 말고 슬기롭게 외교를 해야한다. 정상인은 또라이를 이길 수 없다. 똑똑한 또라이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도 철저히 우리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그게 협상의 기본이다. 그리고 미국에 치우친 시장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 중국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국민 생존권을 지키는 것은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큰 사명이다. 이걸 못지키면 정부가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끝으로,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공장의 불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는 그 불을 보며 자랐고, 또 누군가는 그 불을 지키며 살아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장에 다시 불을 켜는 것이다. 다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러스트벨트는 한국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러면 지구 최후의 날보다 더 참혹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주]


1. 제조 뿌리기업 폐업 증가에…'파산 中企 특허 보존해야'(https://www.etnews.com/20241002000108)

2. 5인 미만 영세 제조업체 폐업 급증…지난해만 5만6천개 사라져(https://v.daum.net/v/20240927143003484)

3. K제조업 엑소더스...‘메이드 인 코리아’의 종언(https://www.mk.co.kr/economy/view/2025/234699/?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

4.삼성전자 (https://semiconductor.samsung.com/kr/sustainability/corporate-citizenship/community-engagement/building-a-bright-future-together-at-our-taylor-texas-fab/)

5. 삼성전자, 향후 3년간 베트남에 대규모 투자 예정(https://www.asean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154)

6. 참고: ‘한국판 러스트벨트’ 느는데, 정부 대책은 올스톱. 동아일보. 2025.01.21.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50120/130898919/1)

7. 참고: [단독] 5월까지 179곳 문 닫아…'산업 심장'이 멈춘다(https://www.sedaily.com/NewsView/267B3FLE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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