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가 말씀하신 따님이군요.”
“네. 애엄마가... 홧김에 나간거라 생각해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안돌아와서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특별하신 분 같습니다. 이렇게 아이까지 키우시다니 말이죠. 수녀님.”
수녀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아이를 안고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벗어나 투명한 벽의 유리문을 열고 나가 아이와 놀아주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네. 이미 교황청에서도 승인이 났습니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같이 악마와의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더더욱 그렇죠. 융통성이 많이 필요한 위치에 있으니 말입니다.”
한국말이 능통한 스페인 사람 원장이 자리에 앉아있는 아담에게 다가오며 끓는 물이 담긴 포트를 가져와 차가 담긴 찻잔에 따르며 말했다.
“악마에 들린 사람본 적 있습니까?”
“글쎄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격는 수많은 유혹과 죄악들이 악마에게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그런 것 말고요. 긴가민가한거 역시 제외하고.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도무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괴물의 모습같은 것 말이에요.”
얼굴을 보지 않으면 스페인 사람인줄 알 수 없게끔 뛰어난 한국말을 하는 그 사람은 다리를 꼬고 앉아 아담에게 눈짓으로 빨리 대답하라고 일렀다.
“아니요, 본 적 없습니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죠. 그런 경험 안하고 사는게 좋겠지만.”
원장은 아담에게 손가락질을 한번 하더니 일어서서 자신의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 CD를 꺼내 DVD플레이어에 넣어 재생시켰다.
“제가 스페인에서 직접 찍은 영상입니다. 화면에 나오는 분은 세비야의 주교님이셨습니다. 지금은 저희처럼 비밀리에 활동하죠.”
저급한 화질이나 화면에 걸리적거리게 나오는 선들은 아주 옛날에 찍은 영상이라고 아담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화면 속에 50대 즈음 보이는 사람은 보기 싫게 많이 나온 배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채플린 식의 수염을 한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화면 속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그에게 성수를 뿌리고 이마에 손을 올리고 기도했다. 라틴어였는데 아담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악마여 지옥으로 돌아가라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마를 받던 남자가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소리지르면서 웃어댔고 –아담은 저게 가능한지 살짝 따라해봤다.- 곧 절망스러운 우는 소리를 내었다. 울음소리 역시 여자의 소리였는데 도저히 그 외모에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였다. 곧이어 그 남자에게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담은 구역질이 나와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고 토악질을 했다. 거의 나올 뻔 했지만 다행히 구토가 나오진 않았고 원장은 괜찮냐고 물었다.
“더 충격적인 장면들이 있습니다.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담은 안보는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또한 의무임과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기를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0분간의 동영상을 다 보고 나서 아담은 혼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본 탓에 아까와 같은 역겨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악마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담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동영상에서는 잠들고 끝이 났는데 그 뒤로도 매일 구마를 했습니다. 무려 3년을 했죠. 그리고 최후에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되었나요?”
“지금 신부님 앞에 앉아있죠.”
원장은 유럽인답게 지나친 손짓과 표정짓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담은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화면 속 남자와 지금 이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원장은 자신의 나이가 46살이라고 했고 다시 물으니 이 테이프는 23년전 영상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는 23년의 세월동안 오히려 외모가 5년은 젊어진 셈이였다.
‘아니, 이 남자는 사실 46살이 아니라 30대후반이라고 해도 믿겠어.’
푸른 눈동자에 베컴 스타일의 머리와 굵고 날카로운 수염과 수염자국들로 감싸고 있는 턱이 주는 이 얼굴의 화려함과 옷 핏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 압도적인 몸매는 화면 속 뚱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였다.
“믿겨지지 않죠? 그게 악마의 힘입니다.”
원장의 이름은 세르히오. 그가 운영하는 이 곳은 5층짜리 건물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세르히오의 개인룸이 있는, 아담과의 면담이 이루어진 곳은 5층이며 그곳은 행정 업무가 이루어지는 사무실이었다. 4층은 성당과 똑같이 되어있어 미사를 드리는 곳이며 3층은 수녀들의 생활 공간이고 2층은 세르히오와 다른 스페인 국적의 사제의 생활공간이었다. 아담은 이 사제를 아직 보지 못하였는데 미사를 드리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오고 나머지 요일들은 대부분 구마를 하러 출장에 나가 외박할 때가 많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1층은 부모 잃은 아이들의 공간이었다. 5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세 명이 수녀 2명과 숫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악마에 의해 부모들을 잃은 아이들입니다. 저희가 돌봐주고 있죠.”
“죽은건가요?”
“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네요.”
아담의 눈에 다미와 같은 나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수녀복을 입지 않은 다른 여자에게 안긴채 젖병을 빨고 있었다. 그 여자는 매우 젊어보여 대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짧은 청색 반바지와 스트라이프 무늬의 상의가 더더욱 그 어림을 돋보이게 했다.
“저 분도 수녀님인가요?”
“아이의 엄마입니다.”
“예?”
아담이 놀란 것은 수녀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그녀가 아이의 엄마라기에는 너무 어려보였기 때문이다.
“아이 아버지가 악마에게 당하고나서 우리가 돌봐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게 하고 돈도 챙겨주고 뭐 그렇게 살아내고있죠.”
“아, 네...”
그 때,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더니 늙은 수녀가 아담의 딸을 데리고 왔다.
“공주님 예쁘게 씻겼습니다.”
세르히오가 활짝 웃더니 아담에게 들어가자고 했다. 세르히오와 아담과 그의 딸은 놀이방 안으로 들어가 넓지는 못하지만 트램폴린 등 다양한 놀이기구와 제법 학교같은 교실, 그리고 안쪽에 들어가보면 생각보다 넓은 수면방까지 보았다. 남자 아이를 안고 있던 여성이 와서 아담에게 안겨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 귀여워라. 안녕.”
아담의 딸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그녀에게 팔질을 했고 아담은 계속 우울해보였던 딸이 그래도 안정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
‘어쩌면 이 분이 다미엄마 역할을 할지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일까? 애초에 이 곳이 하느님의 무대인 것을. 그렇다고 생각해도 이상할거 없지.’
“따님도 앞으로 여기서 생활해야하니 수녀님과 놀게 하면서 적응시키도록 하죠. 저랑 정아씨는 바깥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겠습니다.”
세르히오는 과부 서정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얼굴짓으로 나가자는 메시지를 보냈고 서정아는 그다지 좋지 못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놓았다.
“사무실에 가면 수녀님께서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실겁니다.”
세르히오와 정아는 건물 밖으로 나가고 아담은 딸과 남자 아이가 얌전히 앉아 장난감을 만지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스페인에 다녀 오라고요?”
“네. 가서 장엄구마 훈련을 받고 오세요. 하느님의 기사가 되어 돌아오는 겁니다.”
새벽 1시 번화가에서 조용한 재즈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두 남자는 정숙과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그 정숙을 상대로 서양 남자는 여유있게 칵테일을 음미하고 한 남자는 어정쩡한 시선과 함께 불편한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딸도 데려갈 수 있나요?”
“원래 사제에게 아이란 없는 법이죠. 구마 훈련 기간 동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얼마나 훈련 받아야 하죠?”
“10년이요. 성령의 은혜를 받아 빠르게 강해진다면 더 일찍 올 수도 있고요.”
“그러면 다미는... 다미는 절 잊을 겁니다. 그 나이가 되면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인데요.”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신부님. 저희를 찾아왔을 때에 이만한 각오는 하신거 아닙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이 거룩한 싸움을 위한 작은 희생이에요. 영원히 작별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세르히오는 점점 목소리가 거칠어져갔다.
“제가 없는 동안 다미 출생 신고는...”
“신부님. 어차피 출생 신고는 못해요. 교구에는 박탈당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교황청에서는 특수사제로 등록이 되어있어요. 교황성하께서 신부님의 얼굴과 이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날 아신다고?’
아담은 가슴 속 한 켠에서 뿌듯함이 생겨났다. 이 감정으로 사랑하는 딸과의 작별을 감내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10년은 너무 길었다. 엄마까지 떠나버린 이 아이를 자신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있고 싶다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딸을 굶길수도, 비전없이 살 수도 없었다. 하느님의 기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아비가 되어야 했다. 아담은 그것을 위해 10년의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다른 마음은 모두 포기해버렸다. 고민하는 얼굴로 사실상 무언의 동의와 함께 술을 마시는 아담에게 정아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아는 다가오더니 세르히오 옆에 앉았다.
“아이들은 잘 자?”
“네. 둘 다 한 번 자면 그래도 안깨서요.”
세르히오는 아담의 손을 잡고 다짐을 받아내듯이 압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신부님. 악마들의 무궁무진한 수에 비해 우리 특수조직은 규모가 작은 편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게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출발하셔야해요.”
아담은 대답하지 않다가 잔에 있던 칵테일을 한 입에 모두 마시고나서는 가겠다고 했다. 세르히오는 일주일내로 가게 될거라며 격려하고 자신은 정아와 할 말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혼자 바에서 나와 돌아가는 밤길, 홍등가는 아니였지만 유사한 밤길의 흔적들이 아담에게 옛날 유리를 만나러
가던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데는 충분했다.
‘유리야. 넌 어디서 뭘하니? 나를 만났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니? 나와 다미를 두고 떠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까하는 마음을 가졌던 적은 없었니? 나중에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면 꼭 널 찾을게. 그리고 내가 옳았다는 것을 너도 깨닫게 되면 다시 서로 사랑하며 지내자. 그 땐 다미도 많이 커서 너와 대화도 잘 될거야. 우리 서로의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살자.’
아담은 세르히오에게 압도되어 순간 자율적이지 못한 잘못된 선택을 한게 아닌가 스스로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다시 마음을 애써 바로잡은 뒤 아담은 자신과 부인과 딸의 사랑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생각이 옮겨갔다.
‘성모님. 서로 떨어져 지내는 우리 가정을 다시 모일 때까지 지켜주세요. 하느님에게 우리를 지켜달라고 기도해주세요.’
아담은 손으로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가리고 가려지지 않는 입으로는 대성통곡하며 굽혀진 허리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