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영화 [위플래쉬] 리뷰

by 담작가
위플래쉬
줄거리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며 셰이퍼 음대에 입학한 앤드류.

맡는 학생은 무조건 최고로 만들고야 마는 플래쳐 교수를 만난다.

그의 밴드에 들어가 메인 자리까지 꿰찬 앤드류.

그러나 폭언과 폭행을 서슴치않는 플래쳐 때문에 점점 드럼에 미쳐간다.

집착과 광기어린 연주가 시작된다!


꼰대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숨은 의미 찾기

원래 이런 음악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음악을 가려듣는 성향이 강해서이다. 괜찮은 노래만 재생목록에 추가하고, 꽂힌 노래만 무한 반복 재생한다. 그래서인지 노래가 나오는 영화를 보다보면 익숙지 않은 음계가 내 고막에 파고드는 것이 영 불편하다고나 할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진 않지만, 온전히 받아들이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이것 또한 편견이라서 고쳐야 하는 습성이다.

위플래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 드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게 다지, 실제로 드럼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 영화였다. 티빙 앱 무료영화 목록을 내리다가 그나마 볼만한 영화네 싶었다. 그게 다였다, 한번 봐볼까.


이 영화에는 단순히 악보를 통해 전달되는 음악,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배우가 연기를 잘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무언가를 시작하던 때, 열정이 불타던 때의 자기 모습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은 칭찬에도 하루종일 기분이 방방 떠 있고,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며 실실 웃는 그 모습이란. 반대로 작은 실수에는 분하고 억울해 자신을 몰아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무뎌지는 연습을 한다. 칭찬받았다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혼났다고 특별히 우울해하지도 않는. 그러니까, '적당히' 만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앤드류는 도무지 이 과정이 무뎌지지 않는다. '적당히'라는 수준에 만족할 수가 없다. 자신은 최고이기 때문에, 늘 인정받아야 하고 최고여야만 한다. 자신이 동경하는 최고의 드러머처럼, 모두에게 최고라 불려야만 한다. 그것은 곧 '최고'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도 같다.


이 집착은 비정상이나, 이미 비정상인 사회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거의 90% 가량을 통틀어 앤드류는 '자신을 위한 연주'를 해본 적이 없다. 앤드류는 그저 '보여주기 위해' 드럼을 쳤을 뿐이다. 플래처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증명해보이기 위해, 자신을 무시하는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앤드류의 집착은 '최고'가 아닌 '최고라는 수식어'에 있다. 그리고 이런 집착은 사회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플래쳐는 이 비정상적 사고의 중심에 서서 학생들을 진두지휘한다. 앤드류는 점점 수척해진다. 다크써클은 볼까지 내려온다. 플래쳐의 가르침을 통해 앤드류에게 남은 건 드럼에 대한 광기와 최고에 대한 집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녕 이런 교육이 젊은이와 어린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최고'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정말 최고가 되고 싶은 것은 자기자신이지만, 스스로는 최고가 될 자신감이 없어서. 학생을 자극하고 몰아세워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고 싶었다는 거짓을 일삼으면서. 이것이 바로 참된 스승의 마음이라면서. 결국 젊은이를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누리고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숨긴 채, '너를 위한 거야'라는 사탕발림을 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젊은이들을 죽여가는 게 정말 정상인가?

영화는 이런 기성세대의 잔혹함을 플래쳐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내가 바보로 보여? 너가 증언한 거잖아."

아니라고 하기엔, 플래쳐의 찌질함이 너무도 명확하게 입증된다. 그는 앤드류의 증언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 분해서, 그래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불렀다. 앤드류는 보기 좋게 당했고. 그러나 앤드류는 어쩐지 다시 무대로 오른다.

"엿이나 먹어."

플래쳐가 기성세대를 대표한다면, 앤드류는 젊은세대의 반란을 의미한다.

조종당하지 않겠다, 너 따위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드럼 연주는 결국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이는 아버지에게도 해당된다. 아버지는 무대 뒤에서 아들의 신들린 드럼 연주를 넋놓고 바라본다. 이 역시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품 안에서만 기르려던 부모에 대한 비유이다.

음악을 듣다보면 악기 소리를 하나씩 들으려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밑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의 받침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드럼이다.(내 생각이다. 음악과는 무관한 사람임.) 그러나 앤드류는 마지막 연주에서 그 어느 때보다 신나보인다. 무대를 장악하고, 단원들을 지휘한다. 그가 주인공이다.


결과적으로 앤드류는 최고의 연주를 해내고 천재성을 입증했다. 그럼 된 걸까?

몇몇 사람들은 이 역시 플래쳐가 큰 그림을 그린 거라고 생각하던데, 난 플래쳐의 교육방식이 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앤드류가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보여주기 위한 연주가 아닌, 자신을 위한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드럼의 울림 속에서 미친듯이 드럼스틱을 휘두르며, 자신의 연주에 심취한 그 모습이야말로 '최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한계를 뛰어넘고 자기 안에 내제된 가능성을 끌어낸 것은 앤드류 자신이었던 셈이다.


최고를 소망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고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

애시당초 최고라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다. 기준이 정해져있다는 것부터 이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삐뚤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이 '최고'라는 수식어에 대한 욕망을 자극시키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한다.

우리가 정말 소망하고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대체 뭘까,
최고가 아니면 정말 안 되는 걸까.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너를 위한 거란 거짓말
감상평

영화 내내 가장 보기 힘들었던 장면은 마지막 무대에서 앤드류가 당황할 때였다. 남들이 꺼내는 새 악보를 보며 나타나는 당혹감, 아득하게 느껴지는 관중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구역질이 나왔다.

공감성 수치였다.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말에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그렇게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건 니 생각이고."

그래, 내 생각이다. 최고의 기준은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허접쓰레기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위대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최고, 1등에 운운하는 이 사회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주관적인 범위를 객관적으로 좁히려 드니까. 그건 결국 개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명문대, 대기업, 결혼상대, 하물며 자식까지도 모두 최고가 아니면 박탈감을 느끼게 하고야 만다.

난 외치겠다, 내게 플래쳐 따위 필요 없다고. 그런 미친 또라이 선생 없이도 나는 스스로 가능성을 끌어낼 자신이 있다. 더불어 존경하는 선생 따위도 없다. 내가 만났던 모든 어른들은, 내 가능성을 제한하려고만 들었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 최고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한 발버둥을 요구했다.

난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당신이 말하는 그 기준이 최고라고 어찌 그리 장담하느냐고.

그 최고의 기준은 누가 정했는가. 대체 누가 인정해준다는 것인가. 내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저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는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난 그렇게 사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내 스승은 오로지 나 뿐이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앤드류는 계속 드럼을 쳤을까?"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최고의 연주였지만, 과연 앤드류는 그 이후에도 계속 드럼이 치고 싶었을까? 계속 드럼을 쳤을까? 모든 걸 불태운 그 무대가, 앤드류의 마지막 무대일 것만 같았다. 희망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왜인지 그런 씁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앤드류에게,
결코 지지 말라는 위로를, 엿이나 먹으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네는 바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