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작가 Apr 27. 2021

선크림에서 얻은 인생 교훈

퇴준생 보고서 27 - 꿈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뭐야, 이것도 버려야 돼?"

포장조차 뜯지 않은 선크림이었다. 유통기한이 한두 달도 아니고 여섯 달이나 지났다. 쓰던 선크림이 오래돼서 새 걸 꺼낸 건데 새 상품이 더 오래되었다니. 세일할 때 쟁여두길 잘했다고 나 자신을 칭찬하던 참이었는데 스스로에게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퇴사 후 집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일까. 더러운 방이 영 신경 쓰였다. 청소를 깨끗하게 해도 더럽다는 느낌은 통 지워지질 않았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이건 먼지나 때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꽂이와 화장대, 책상을 가득 채운 쓰지 않는 물건들이 문제였다.

난 늘 맥시멈리스트에 가깝게 살아왔다. 당장 쓰지 않아도 언젠가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샀다. 싸면 무조건 많이 샀다. '배송비도 아끼고 물건도 쟁이고 완전 합리적 소비'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칭찬했다. 물론 자주 쓰거나 필요한 물건들은 더 많이 샀다. 최근 들어서야 이게 바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충동적 쇼핑이라는 걸 알긴 했지만. 당연히 얇아진 지갑 사정도 한몫 하긴 했다.

일단 폭주는 멈췄지만, 그전에 사놓았던 물건만으로도 방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물건 속에 파묻혀 사는 것도 딱히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오랜만에 정리라는 걸, 이번만큼은 좀 과감하게 해 보기로 했다.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물론 내가 정리를 태어나 처음 해보는 건 아니다. 다만 주기적으로 청소병이 온다. 눈앞에서 싹 치우고 깔끔하게 정돈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시기가 온다. 문제는 그때마다 '아, 이건 두면 쓸 것 같은데' 하는 물건을 구석에 처박아둔다는 것이지만. 덕분에 청소를 하고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또 청소를 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뿐이다.

이번 청소병의 시작은 화장품이었다. 화장대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번만큼은 '그동안 안 썼고, 앞으로도 쓸 일 없다' 싶은 건 많이 남아 있어도 무조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쓰레기통에 분리하던 도중,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한다. 백 원 딜에 현혹되어 샀다가 뜯지도 못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선크림이 바로 그것이다.

"배송비만 내면 된다고? 세일한다고? 이건 사야 돼, 무조건 사야 돼!"

쓰레기통에 담긴 화장품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샀던 것들이다. 혹은 정말 갖고 싶어서 샀는데 어울리지도 않아서 처박아뒀든가. 구매할 때는 없으면 못 살 것 같더니만, 막상 사고 보니 없어도 잘 살더라. 버릴 때까지 그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한 걸 보면 말이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물건을 처박아두는 심리는, 우리네 인생과도 비슷하다.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거지 같은 회사라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일랑 일단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닌가. 직장인은 늘 사직서 하나쯤 품고 산다는 말로 하면 더 이해가 쉬우려나.

같이 일하던 동료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마다 사직서 대신 인수인계서 파일을 꺼냈다. 언제 갑자기 그만둬도 다음 사람이 바로 일할 수 있게 인수인계서를 업데이트하겠다던 그의 광기 서린 눈빛을 기억한다. 당장이라도 퇴사하고 싶은 마음은 서랍 더 깊숙이 넣어두는 으른의 모습이란...

문제는 내가 당장 하고 싶은 무언가, 보통 꿈이라 불리는 것도 서랍 속에 처박힌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인과 관계이다. 회사 생활에 쪼이다 보면 당장 무언가를 할 여유가 없게 되니까. 여행만 해도 그렇다. 하루 이틀 연차 내는 것도 타이밍 맞추기 힘든데, 한 두 달 유럽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결국은 서랍을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퇴사'와 '꿈'을 두고 고민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이미 꽉 찬 서랍에는 두 개 다 놓을 자리가 없다. 하나를 버려야만 내가 현재 보관해야 할 다른 목표를 넣을 자리가 생기니까. 너무 극단적이라고? 퇴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내가 처음으로 서랍장을 정리했던 때가 고3 수험생 시절이었다. 나는 '수험생활'을 때려치우지 않는 대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정리했다. 그게 합리적이기도 했고, 수험생활을 아예 포기한다는 것은 좀 힘들었으므로.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물건이든 생각이든, 당장 꺼내서 써야 할 적당한 때가 있다. 시기를 놓치면 끝내는 버리게 된다. 선크림에 아무리 방부제를 쏟아부어도 유통기한이 반년이나 지난 화장품을 얼굴에 바를 수는 없다. 어떤 물건이든 영원히 새 것인 물건은 없다.

생각이나 감정도 마찬가지로 유효기간이 있다.

서랍 속에 넣어둘 때야 찬란하게 빛났을지 몰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녹슬기 마련이다. 확고하고 단단했던 신념도 물러질 수 있고, 구체적이고 진했던 꿈도 빛이 바랠 수 있다. 그럼 사람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것부터 버리기 시작한다. 왜? 그건 이제 빛나지 않으니까.

그러니 아끼거나 마음에 드는 꿈일수록 자주 사용해주어라.
그 꿈은 당신이 지금 바로 사용해주어야만 의미가 있을 테니까.




결국 선크림을 버렸다. 배송비만 내고 샀으니 가격이 아쉽지는 않았다. 그보다 아쉬웠던 건, 이 제품을 경험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었다. 내 피부에 맞을지, 어느 계절에 쓰면 좋을지, 앞으로 또 사도 괜찮을지 등등. 한 번이라도 얼굴에 발라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

물론 선크림이야 다시 사서 써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 번 버린 꿈은 다시 찾기 힘들다. 내가 손수 재배하고 길러내서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제품이기 때문이다. 세상 누구도 나와 똑같은 꿈을 팔아주진 않는다. 심지어는 나 자신도 그때 했던 생각과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할 순 없다. 사람은 변하니까.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그렇다고 지금 하는 걸 다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것만 하라는 건 아니다. 현실에 타협하면서 살아갈 부분이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잔혹한 사회의 현실을 맛봤기에.

다만, 그 꿈과 생각을 내가 자주 꺼내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을 필요는 있다.
너무 깊숙이 넣어두면 어떤 생각이었는지, 잊어버리기 마련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백수가 되고 처음 받은 실업급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