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게임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
우습게도 나의 병적인 완벽주의 성향을 알아차린 결정적 계기는 한 게임을 통해서였다.
친구들과 함께 맵을 돌면서 마피아를 찾는 게임을 하면서 나는 계속 범인에 걸렸다. 내가 게임을 터득한 유저였다면 재밌게 즐겼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이제 게임을 막 시작한 참이었고 아직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게임을 하는데 계속 들켰고, 그 과정에서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생각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이 생각의 흐름은 생각을 하는 주체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생겨난 감정과 생각들이 한데 뭉쳐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생각의 흐름에서 끝자락만을 부여잡고는 나의 행동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판단한다. 나 역시 그랬다. 생각의 끝자락에서 내가 가까스로 확인한 것은 짜증과 원망 사이 어디쯤이었고, 나는 친구에게 짜증을 툭 던져버렸다.
차라리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걸. 나는 게임을 끄고 난 후부터 점점 더 불편해졌다. 불편함은 아예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는 작아지기는커녕 몸집을 불리며 잘 익어갔다. 게임이 제 맘대로 안 풀린다고 짜증을 내던 나는, 이젠 친구에게 짜증 낸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워지는 중이었다.
'왜 네가 못한 걸 짜증 내?
왜 이런 걸로 화내?
넌 진짜 쓰레기야. 아마 그 친구도 똑같이 생각할 걸?'
어떤 사람들은 이딴 사고 구조를 보고 황당하다 못해 우스울 것이다. 실제로 저런 생각의 연결고리를 말해주면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나도 안다. 내가 셀프로 비싼 값을 쳐서 걱정을 사겠다고 흑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저렇게까지 쓰잘데기 없는 방면으로 깊숙이 탐구하는 인간은 거의 없을 것이며, 내가 사과한다고 해도 저 사람은 별생각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나는 '겨우 게임' 가지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극한의 인간 말종 쓰레기 취급하는 이유에 대해 되짚어보고자 했다. 내가 마지막에 느낀 짜증과 원망에 매달린 꼬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분명 그 원인이 나올 것이었다. 이런 생각과 결론을 내리게 된 시작점. 그건 생각보다 간단하고 명쾌했다. 내가 게으른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업무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하루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일 뿐, 실제로 완벽주의자들은 생각보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까지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내가 웃자고 하는 게임에 죽자고 달려드는 것처럼.
승부욕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물론 승부욕이 강한 것도 완벽주의자들의 지독한 특성 중 하나지만, 그만큼 때려치우는 속도가 빠른 것 역시 그들의 지긋지긋한 습성 중 하나다. 완벽주의자들도 이러한 습성 세트를 구매할 때 이런 사고방식이 일상 곳곳에 깊숙이 침투한다는 부작용까지 패키지에 포함된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 게임을 처음 했지만 잘해야 했다. 그건 사람이 보라색 오줌을 싼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일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친구들과 게임을 하기 전에 미리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해서 충분히 게임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완벽하게 '게임 잘하는 친구'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당연하게도 나는 게임 연습을 미리 해보지 않았다. 첫 판에 모든 걸 꿰뚫어 볼만큼 잘하는 모습을 보이려면, 그전에 얼마나 많은 게임을 해봐야 하는지는 나 자신도 가늠하지 못했기에. 그저 연습판 게임을 몇 번 돌려보고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임했던 게 분노의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나의 이런 내면의 소리를 듣게 만든 [수치심 권하는 사회]라는 책에서 저자는 '수치심'이 죄책감, 굴욕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설명한다. 어떤 행동에 대한 자기반성이나 비판적 사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바로 수치심이다. '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가 아니라 '난 왜 이렇게 행동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수치심이다.
내 뇌를 지배하는 모든 것들이 수치심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또 한 번 수치심을 느꼈다.
자기혐오는 이미 피까지 스며들어서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 즉시 끓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언젠가부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당연해졌다. 우습게도 나는 이게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나에 대해 명확히 알고 나니,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완벽하지 않아 수치심을 느끼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에 대한 공개적 일기가 바로 그것이다. 한 번도 이런 답답함을 토로해본 적이 없다. '완벽하지 않음'에 솔직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야기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원했던 내 모습은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하는 나'였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불안하다. 겨우 이런 글을 쓰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나는 왜 이런 엉망진창의 글을 세상에 내보내고 싶은가. 정제되지 않은 마음을 내뱉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왜 이렇게 대책도, 생각도 없이 무책임한가. 나는 왜 한 번에 완벽하지 못하나.
많은 생각이 나를 지배하려 들었기에, 일단 무작정 써 내려가지 않으면 분명 이 고통이 반복될 것이었다. 그럼 난 영원히 고쳐지지 않은 채로, 늘 불만만 쏟아내는 앵무새 인형처럼 살아가겠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느니, 딱 한 번 죽기보다 싫은 짓을 한 번 해보는 게 나았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기.
그 기록은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로서 증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