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완벽에서 나의 불완전만 골라내기

가장 쓸모없는 초능력

by 담작가

[수치심 권하는 사회]의 저자 브레네 브라운은 말했다. 상대의 상황에 내 문제를 개입하지 말라고. 하지만 교수님, 그게 그렇게 쉽게 된다면 세상에 갈등이 왜 존재하고 자격지심이라는 단어가 왜 있겠습니까. 쉽지 않으니 그런 거지요.

나는 교수님의 말씀대로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내 문제 상황을 개입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내가 어려운 분야는 ‘상대의 잘 된 일’에 ‘나의 비루함’을 개입하지 않는 일이다. 그건 노력의 영역이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완벽주의자는 성공에 대한 기준이 남들에 비해 훨씬 높다.

보편적 성공의 기준은 지극히 당연하고, 추가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 삶’에도 근접해야 성공으로 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다행인 점은 어차피 나 아닌 남에게는 관심이 없어서 그런 미친 잣대를 남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들이댄다는 사실이다. 사사건건 모든 일에 시비를 걸고 다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오해 않았으면 한다, 그런 사람은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불마니스트’ 일뿐이다.

보편적 성공이라 하면 흔히들 명예나 돈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요소만 갖춘다고 해서 성공과 직결되는 건 아니다. 인생이 레이스라면 누군가는 도착선 바로 앞에 떨어지기도 하고, 누구는 출발선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 떨어지기도 한다. 남들보다 두 배는 바쁘게 뛰어야 하는 게 불공평한 건 맞지만,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이렇듯 자신을 혹독하게 조여 오는 환경을 탓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도착점에 가야
‘위대한 마라토너’가 될지에 더 집중한다.

도착지점이라는 절대 부동의 목표가 존재할 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부가적 목표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생겨난다. 이는 [과정까지 완벽해야 진짜 완벽이지​]에서 말한 부분이다. 이해가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대부분 사람들은 여행을 갈 때 ‘뭘 타고 갈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여행지를 자동차로 타고 간다고 결정할 경우, ‘자동차를 몇 km로 밟아서 몇 시간 안에 도착할지’까지도 염두에 둔다고 해야 할까.

쉽게 ‘쓸데없는 것까지 고민한다’고 해석하면 되겠다.


그러니 게으른 완벽주의자에게 자기 계발 서적이 해독제 없는 독약일 수밖에.

나는 모든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점만을 콕 집어서,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려고 한다. 이 길로 가면 정상에 가서 ‘난 이런 길도 걸어왔다’고 거들먹거릴 수 있을만한 길인지 재본다는 소리다. 만약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라고 판단되면 그 길을 나의 등산코스에 추가한다. 알고도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옷 속으로 불안함이라는 개미가 침투해 온몸을 기어 다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상에 너무도 많은 자기 계발 서적이 출판되다 못해, 이제는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들의 성공 스토리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독약이 만연한 요즘이다, 적어도 나에겐.


지름길만을 택해 가는 게 좋지 않다는 시선이 주류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상의 기준을 단일화하던 때의 얘기다. 성공이라는 범위가 점점 개인화되고 다양화되고 있다. 그러니 지름길은 더 이상 나쁜 것이 아니다. 자기 성장과 발전을 위해 야무지고 스마트하게 지름길을 찾는 것도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되는 사회다.

그들을 보다가 시선을 내게 돌리면 여전히 나만 정상까지 한참 남은 상태다.

힘들어도 내려갈 수 없다. 당장 발 밑으로 보이는 산 아래 풍경이 아득해서 발을 내릴 자신도 없으니까. 나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는 등산 코스를 부여받고는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을 헤매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무성한 수풀 틈에 쭈그려 앉아, 나는 조난당했으며 영원히 정상에 갈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이다.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등산 코스를 짤막하게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꿈꾸는 게 ‘완벽한 성공’이기 때문이다.

어중간하거나 애매한 성공이 아니라, 내 삶을 자서전으로 썼을 때 모양 빠지는 구석 없이 모든 모퉁이가 퍼펙트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거친 등산 코스를 전부 거쳐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것도 저것도 하다 보면 완벽해야 하는 범위는 점점 넓어지는데 배낭 속의 초코바는 점점 줄어든다. 그 많은 걸 다 하려니 결과가 엉망인 건 물론이고 대게는 그 과정조차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헐떡인다. 결국 마지막 초코바를 까먹음과 동시에 의지가 매진된다.

자리에 주저앉아 있노라면 구조대가 온다. 그건 바로 ‘어디선가 새로운 등산 코스를 알아온 나 자신’이다. 보통 출발할 때는 마구 탕진해도 상관없을만한 양의 의지를 챙겨 오기 때문에, 배낭이 다시 초코바로 빵빵해진다. 또 다른 나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다시 산을 오른다. 그러다가 초코바가 동나면 다시 주저앉아 구조대를 기다리고… 악순환이다.

그러고 나면 산에 남는 건, ‘이 길로 가야 하네’, ‘저 길로 가야 하네’하며 투닥거리는 수많은 ‘나들’ 뿐이다. 그들은 정상으로 간다는 목표를 상실한 채, 그저 가야 한다는 미련만 남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간다. 아마 내가 자기 성찰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왜 초코바가 더 빨리 줄어드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남들은 이 코스로 가서 완벽해졌는데, 나는 왜?”

앞서 말한 이 사태를 발견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왜’를 물었다. 왜 나는 나를 이토록 불행의 궁지로 몰지 못해 안달이 났는가.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의도하지 않은 타고난 DNA였다. ‘성공’에만 초점이 맞춰진 메마른 눈동자로 타인의 행적을 좇기 때문이다.

난 탁월한 안목으로 주변 사람들의 잘난 점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부러워한다. 그 안목만 발달했으면 좋았으련만, 난 그와 대비되는 나의 못난 점을 찾아내는 능력도 출중하다. 남에게는 행복하되 나에게는 불행한 초능력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던가. 나는 가랑이가 찢어지다 못해 치질까지 걸린다. 성공을 위한 보통의 시도는 금방 사그라든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내가 남의 성공이나 성취를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내 실패를 슬퍼하느라 바쁜 졸렬한 인간이라는 쓴 사실만을 얻으면서. 남의 이야기를 배 아파하며 듣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불쌍해진다.

타인의 완벽에서 나의 불완전함만을 찾아내는 기구한 초능력이라니. 참으로 쓸모없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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