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까지 완벽해야 진짜 완벽이지

나의 완벽은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by 담작가

슈퍼우먼 신드롬이라는 증상이 있다. 직장생활/ 가사/ 육아 삼박자를 모두 완벽하게 해내려는 기혼 여성에게서 보이는 스트레스 증후군이다.

완벽주의자는 기혼 여성이 아닐지라도 이와 유사한 ‘슈퍼 인간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가사와 육아 등의 분야가 아니더라도 인생에는 할 일이 많다. 그들은 내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완벽한 인간이고 싶어 한다. 내가 관계를 맺고 꾸준히 행위해야 하는 집단에서 나는 늘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완벽주의자를 그저 결과나 성취에 집착하는 찌질한 냉혈한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그건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완벽주의자는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건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돌린 시뮬레이션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거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여기에 ‘게으른’까지 추가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실패 경보기’다. 냉철하고 빠른 자기 평가가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게 기본 옵션인데, 이것은 MBTI에서 J냐 P냐 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르다. 이 시뮬레이션이란 것은 그저 나의 다음 행동으로 인해 발생될 그다음 상황을 자꾸만 예측하는 병에 불과하다.

문제라면 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나는 항상 실패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이래서 실패, 저렇게 하면 저래서 실패.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끊이지 않는다. 삶이란 게 결국 선택의 연속이고 이 선택은 일종의 도박과도 같다. 어떠한 안전도 보장되지 않은 도박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짓이기에 실패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은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시나리오를 찾지만, 그런 것이 존재할 리 없다. 뇌가 경보음으로 가득 찰 즈음이면

“아, 그냥 포기하자.”

가 되어버리는 게 바로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의 한계인 셈이다.


나는 이런 자신을 너무 잘 알기에 아침에 눈을 뜨면 공책을 펴 ‘할 일’이라고 적었다.

그 밑에는 오늘 할 일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빼곡하게 적었다. 황당하지만 나는 어플로 영양제를 주문한다든지, 물을 몇 컵 이상 마신다든지 하는 너무도 사소한 일까지 목록에 추가했다. 대수롭지 않게 적힌 그 문구가 나를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도 모르고.

시간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결코 내가 쓰고자 한 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 7일 중 6일 정도는 ‘오늘은 이것만 하는 거야’라고 적어놓은 일들 중 하나도 제대로 지우지 못했다.

그럼 나는 ‘이것만 하자’에서 ‘이것도 못하다니’로 변질된 마음을 뱉으며, 실패감에 휩싸인 채 자포자기 심정으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일주일 중에 하루 정도는 목록을 전부 지운 날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날 역시 ‘할 일을 끝냈다’는 사실보다 ‘할 일 다 하니까 벌써 새벽 2시야’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 할 일 목록에는 ‘12시 전에 잠들기’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내게 ‘그럼 차라리 내일로 미루고 일찍 자’라는 식으로 위로를 건넸지만 소용없었다. 일단 할 일을 뇌에 각인시키고 집중력을 포획한 순간부터 이미 출발해버린 청룡열차처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을 다 끝내고도 현타가 온다. ‘아, X발, 또 망했네’ 하면서.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그런 점에서 최악이다.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필연적으로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모든 상황을 부정해야 한다는 점 말이다. 이걸 해도 별로, 저걸 해도 별로. 할 일을 마쳤지만 잠을 제 때 못 잤으니 망했고, 잠을 제때 자면 할 일을 다 못한 거니 망했다. 과정과 결과 중 단 하나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망한 것이니 결과적으로 난 7일 중 7일을 망치곤 했다.

난 무언가를 이루고도 늘 패배의 길로 인도당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선택을 뒤로 미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 대부분의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이 이러한 연유로 모든 선택을 미루는 습관이 형성될 것이다. 그들은 ‘할 일’을 미루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 자체를 미뤄버린다. ‘오늘 이걸 해야지’라는 다짐 자체를 미뤄버린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니 게으를 수밖에.

만약 직장이라도 다닌다면 어쩔 수 없이 미루지 못하는 것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좌절감이나 자책감에 젖을 시간도 줄어든다. 하지만 나는 의무가 없는 백수였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때론 나 같은 사람을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칭하는 게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출근과 퇴근이 없을 뿐이지, 나의 하루는 늘 지옥철에 낀 듯 답답하고 정신없고 바삐 흘러갔다. 머릿속으로 ‘하루를 활용하는 101가지 방법’ 따위를 고민하면서 손으로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다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모든 걸 놔버리며,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전혀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술안주 삼아 씹어댔다.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게으르면서 행복하면 나무늘보에 가깝겠지만,
나는 게으르면서 불행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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