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얼마나 못했길래

완벽에 대한 기괴하고 지독한 집착의 시작

by 담작가

언젠가 글을 포기하고 싶었고, 그래서 거의 포기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창작에 대한 동경, 그것을 해내는 사람에 대한 존경,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어린 날의 꿈이 바로 '작가'였다. 글자와 글자를 엮어 문장과 문단과 소설을 만들어냈을 때, 이미 글이란 내 영혼에 새겨진 소명이나 다름없었다. 글은 어느 순간 내게 가벼이 다가왔고 나는 나의 창작물의 손에 이끌려 세상으로 나왔다. 나는 내 글을 보여주는 것만이 내가 완성되는 순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럼에도 그때 글을 포기하려고 했던 이유는,
현재 내 능력으로 거기까지 가기엔
한참 멀었다는 사실에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깨달아버렸다. 내가 아무리 나를 천재라 불러도, 진짜 천재는 아님을. 나는 내가 잘 써서 글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써놓고 보면 항상 난 그냥 쓰는 걸 좋아했던 것뿐이었다. 잘함과 좋아함의 영역은 엄연히 달랐다.

그저 '좋아하는 것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겠거니' 믿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잘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 못 견뎌했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이 짓을 계속한다는 게 미련해 보일까 봐서. 이렇게 멍청하고 한심한 자격지심을 갖추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나조차 믿기지 않지만, 나는 어릴 적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정말 천재여서인지, 아니면 그저 손주 자식 혹은 조카가 천재이길 바라서 굳게 믿었던 가족들의 믿음에 불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천재여야만 했던 나'는 일찍이 조기교육을 시작했다. 뇌리에 박힌 믿음은 맹목적이고도 강력했다. 심지어는 그 당시의 나도 믿을 정도였으니.

주입식 교육은 한 번 진도를 놓치는 순간 끝장이다. 무한경쟁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세대답게 주위 친구들은 모든 교과목마다 학원이나 과외를 다녔고, 하다못해 학습지라도 풀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밤낮으로 돈벌이를 하는 부모님의 피치 못할 무관심과, 될 대로 되란 식의 반항적 심리를 동시에 겪으며 심각한 중2병 말기에 접어들었다. 하나, 둘 교과목 진도를 놓치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닌, '못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서 불편한 마음보다 편안한 마음이 더 커지려는 어느 순간 '공부를 아예 안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엉망진창의 성적표를 받아 든 부모의 표정을 목격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얘보단 등수 높겠지'라고 생각했던 친구보다 내가 아래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다시 공부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천재가 문제아가 되는 건 찰나지만, 문제아가 다시 천재가 되려면 억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학기 공부해서 다시 전교 1등이 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 기간은 적어도 내 인생에서 부모의 개입 없이 내 의지로 공부를 해본 첫 기억이었다. 그 이전까지 공부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비록 오기로 시작한 것이긴 하지만, 나름 차근차근 먼 미래의 목표까지 세워가며 나는 무중력 상태의 정신상태를 현실세계로 끌어오는 중이었다.

그다음 시험에 나는 전교 등수를 80등 정도 끌어올렸다. 자랑스러웠다. 누가 나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해냈으며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성취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가족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얼마 전까지 나는 내가 후회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는 생각보다 많이 후회하는 타입이다. 다만 후회의 순간들이 스스로에게 수치스럽게 작용해서 자꾸만 외면할 뿐이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이 후회한 카테고리는 '말실수'에 관한 것이다.

난 그 이야기를 가족들 앞에서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아직도 내가 그 말을 꺼내던 순간의 싸늘한 공기가 떠오르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대체 얼마나 밑에 있었길래 80등이나 오르냐."

잠깐, 아주 잠깐 침묵이 흐르고 어른들은 이 얘기를 덮기 위한 다른 주제를 꺼내려 애썼다. 말을 던진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의 잔혹한 농담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날도 우스갯소리로 넘겨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물총 놀이를 하자고 쏜 물줄기가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어서는 진짜 총알이 되어 내 가슴을 정확히 관통했기 때문에. 게다가 서글프게도 나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대부분 그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듯,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다. 타인에게 1등, 최고, 정상의 위치를 보여줄 수 없으면서 섣불리 무언가 하는 중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나는 그날, 그 순간 그런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겼다.

살아보니 그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마음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그 농담에 대해 분노하거나 그를 원망하거나 동조한 이들을 증오하거나 하고 싶진 않다. 그래 봤자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은 기억조차 못할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 경험이 나의 '완벽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켰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누군가 근황을 물을 때면, 나는 굉장히 바쁘고 무언가를 많이 하는 사람처럼 말한다. 곧 엄청난 성과를 이룰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유명인이 되고 떼돈을 벌어들일 것 마냥. 하지만 그렇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하면서 남몰래 괴로워한다. 또 시간이 지나 근황을 물으면 여전히 그러고 있노라고 말하게 될까 봐. 그럼 그 사람이 나를 비웃을까 봐.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봐.

지금 하는 것들이 실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기엔 억울할 정도로 열심히 산다. 스스로 10을 계획하고 3이나 4밖에 못했다고 채찍질하면서. 일단 그런 생각이 들면 하던 것마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제도 못했고, 그제도 못했던 일을 오늘의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못하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돌아버릴 것 같다.


"당신에게는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말에 이렇게 대꾸하고 싶다.

"그렇지만 끝내지 못한 일을 멈출 용기가 제게는 없는데요."

하기 싫은 걸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기본 옵션조차 갖추지 못한 띨띨한 인간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붙잡고 이런 생각이 나를 지배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도 틈틈이 들어오는 방해공작에 나는 순순히 무너지고, 무너지는 순간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해 다시 내일로 미루게 된다.

어쩌면 주변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방어 기제가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모습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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