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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Aug 24. 2021

현재를 살기로 한 인간들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리뷰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서평을 작성했으나 솔직하고 주관적인 생각임을 명시합니다*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줄거리

카지노 촌에서 나고 자라 ‘캐딜락 전당포’ 성 사장 밑에서 일하는 진. 기면증을 앓는 탓에 학교도 그만두고 어린 나이부터 돈벌이를 시작해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가벼운 기면증을 앓는 게 아니란 걸 눈치챈 것은, 깨어났을 때 늘 성 사장의 캐딜락 뒤였기 때문.

어느 날, 다른 전당포 무리에게 쫓기다가 쓰러진 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성 사장의 캐딜락 뒤에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자신의 시계는 한 시간 남짓 흘러갔는데, 남들은 그가 지금 나갔다가 바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기면증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기로 한 인간들
숨은 의미 찾기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 ‘동안’이라는 말이 칭찬이 된 것은.

사람들은 유독 젊어 보이는 것, 어려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그것이 단순히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깎아보려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붙잡지 못하고 손 틈 새로 흘려보낸 세월이 아까워서 그렇다. 그럼에도 지나간 날들이 다시 내게 오지 못함을 알기에, 한 살이 아닌 하루라도 젊었던 날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에 불과하다.


소설 속 ‘포트’는 ‘젊음’에 대한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에 대해 보여준다.

포트를 열 줄 아는 일명 ‘게이트’들은 보통 그 유용한 능력으로 범죄조직에 기생해 살아간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공간이동능력이 나이를 먹으며 점점 사그라든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고 포트의 크기 점점 줄어들면 그들은 범죄조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공항이나 카지노에서 손바닥만 한 포트로 소매치기를 하거나 칩을 훔치며 살아간다.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편리했던 젊은 나날들을 잊지 못한 채, 손바닥만 한 욕망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며 살아간다. 그들은 젊음을 기억하고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손바닥에 남은 옅은 열상(포트를 만들기 위한 에너지)을 자꾸만 내뿜으며 점차 죽어간다. 한 회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욕망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중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뭐든 것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만, 그 역시 시간만큼은 제 멋대로 어찌할 수 없다. 늙고 병들어 게이트로서의 힘을 잃은 그는 새로운 힘을 원한다. 자신을 더욱 강하고 젊게 만들어 줄 힘. 그래서일까,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임에도 고작 칩이나 훔치며 버려진 차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장수꾼들과 그가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은.


정희는 한 회장의 반대에 선 인물이다.

그녀는 포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숨기며 살아간다. 그 이면에는 조직생활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능력 있는 게이트로 살던 과거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맞부딪혀가며, 능력을 숨긴 대가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데 만족한다. 그런 그녀가 8년 만에 포트를 여는 순간이 온다. 바로 눈앞의 자식을 지키기 위한 욕망이 발현될 때다.

이처럼 제 삶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배준과 심 경장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정희와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포트를 열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자기 현재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그로 인해 맞이한 현재에 절망한다. 그들은 한 회장과 다르지 않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망령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은 어떨까. 그가 포트를 여는 주요한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버지, 양어머니, 성 사장과 철민, 진은 그들을 잃을까 두렵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잃는 것이 두렵고, 그 두려움은 슬픔이 되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데 쓰인다.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중

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가 지키는 것은 현재다. 차곡차곡 내 힘으로 쌓아온 것들을 지키고, 허황된 미래를 꿈꾸거나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진이 원하는 것은 현재의 ‘삶’ 그 자체다.

제목에서도 나오듯, '흰 캐딜락'은 성 사장이 타고 다니는 차다. 지친 과거를 이끌고 찾아간 곳에서 성 사장은 흰 눈으로 뒤덮였다가 간신히 구출되며 다시 살게 된다. 그는 불안하고 거친 과거를 살며 후회를 남겼지만, 결국 남겨진 삶을 부정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로 한다. 장사하는 사람이 전당포 문을 하루라도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신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성 사장은 삶을 원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감에 있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태도는 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를 오롯이 바라보는 진의 모습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꿈꾸는 다른 인물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들은 현재를 바라볼 줄 모른다. 그러므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우리들 역시 소설에 나온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느라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찬란하고 멋진 미래는 내가 오롯이 현재를 살아나가야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괴물이 될 것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으리.


융복합 장르소설
감상평

최근 타임머신과 관련된 작품들(백 투 더 퓨처 / 대탈출 4-백 투 더 아한)을 많이 접해서인지, ‘포트’라는 단어가 마냥 생소하거나 어색하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하긴, 마블을 굳이 챙겨보지 않는 나도 ‘닥터 스트레인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솔직히 이제는 ‘공간이동’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다지 신선하거나 흥미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꽤나 재미있었다. 평소에 누아르라면 딱 질색인데도 이 소설은 괜찮았다. 아마 SF라는 장르가 결합된 융복합 장르이니만큼 상호 간에 부족한 점을 보완해줘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거친 사건들만 주목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SF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말이다.

처음 읽을 때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등장해서 살짝 정신없었는데, 막상 흐름이 잡히기 시작하니 강한 흡입력으로 독자를 책 속에 끌어들였다. 가독성도 좋아서 책 읽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술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경험이나 조사가 철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카지노는 물론이고 전당포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 이미지가 그려지듯이 생생했다. 작가로서도 많이 배웠던 작품.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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