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나이 11살, 드디어 건강검진을 하다
글자가 제 멋대로 자리를 이탈하고 있었다.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있은지 두 시간쯤.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게다가 오후 느지막한 시간인데도 개와 고양이를 안고 동물병원을 찾는 보호자가 제법 많았다. 부산스러운 발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주변이 산만했다. 바로 그때, “모모, 콩 보호자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애기들 혈액 관련 검사 때문에 한 3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지금 수치가… 아, 이건 검사 끝나면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주치의 선생님은 친절했고, 나는 매너 있는 보호자이고 싶었으므로 괜찮다고 말하며 웃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이미 ‘대체 무슨 일이길래?’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책을 덮고 다시금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호명될 때까지 다리를 떨며 기다려야 했다.
내 몸뚱이야 확인하기 싫어도 나라에서 하라고 등 떠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개는 내가 억지로 데려가지 않으면 그럴 기회가 없다. 게다가 인간처럼 건강보험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시간이 없고 비싸단 핑계로 여러 가지 검사들을 미뤄왔다. 어딘가 아파 보이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만 검진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개도 나이 들었다는 걸 체감했다. 필요할 때마다 새 얼굴을 만들어 끼우는 호빵맨처럼 살면 좋으련만. 11년, 개들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같은 몸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생도 그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오래 살길 바란다면 꾸준히 건강검진을 해야 한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된 건강검진이 내 기억으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의 수명을 생각했을 때 11년이면 점검을 하고도 남았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게 돈이 있고 아직 개가 아픈 곳이 없을 때 건강검진을 해줘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당연히 긴장될 수밖에.
여태껏 제대로 돌보지 않은 나날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귀찮다고 이 닦아주지 않았던 날들, 목욕을 하루 이틀 미뤘던 일들, 밥 줄 때 영양제를 깜빡했던 것들. 나의 행동들이 거대한 재앙이 되어 돌아올까 봐 미리 죄책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더불어 이 조그마한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내가 즉각 알 수 있지만,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내가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 속에 안 좋은 무언가라도 키웠을까 봐, 입원이나 수술로 이어질까 봐 초조했다. 이런 걱정이 개의 건강검진을 미뤄온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들여다보지도 않고 병이 있음 어쩌나 하는 고민을 할 순 없었다. 결과가 어떻더라도 내가 돌봐야 하는 개님이니까.
“우선, 11살 치고는 정말 건강한 편입니다.”
내 미간에 깊은 시름이 담겼다는 것을 눈치챈 주치의 선생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해주셨다. 더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삼십 분 가량 앉아있으며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터였다. 그 준비가 무색하게 선생님은 너무 건강해서 놀랐다고 했다. 선생님이 웃고 나서야 그게 보호자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이후 이어진 브리핑은 세세히 말 하기엔 너무 길지만, 어쨌거나 대체로 문제없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수치가 높거나 미세하게 신경 쓰이는 점들도 당장 조치를 취할만한 것들은 아니라고. 다만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어쨌거나 노화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어찌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개 나이를 자꾸만 강조했다. 사람 나이로는 65살에서 70살이라며 이 정도 나이 치고는 매우 건강하다고. 하지만 아무리 나이에 비해 건강한 거라 해도, 70살인 것에 비해 건강한 것 아닌가. 개가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고도 남은 수명은 대체 얼마일까 헤아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앉아있을 순 없었다. 남은 기간이 얼마가 되었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보살피고 아프지 않도록 살펴보는 것뿐이라는 점만은 확실했기에. 나는 다시 힘을 내야만 했다. 무작정 슬퍼했다간 당장 돌볼 수 있는 것 마저 돌볼 수 없게 된다.
난 보호자니까, 개님을 돌보고 보살피는 건 집사로서의 행복이니까.
“우린 이제부터 성장이 아니고 노화하는 거야.”
내가 스무 살이 되던 1월 1일에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다. 성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나이 먹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소리기도 했다. 10대 때는 나이를 어떻게 먹든 ‘자라고 있는 미래의 새싹’ 정도로 커버가 됐지만, 성인이 된 순간부터는 그저 ‘늙어가는 중’이라는 상태 메시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최근 노화했다고 확실하게 내밀 수 있는 증거는 바로 소화기능이다. 조금만 급하게 먹거나, 많이 먹거나, 기름지게 먹거나, 안 먹어버리면 바로 문제가 생긴다. 먹어도 힘들고 안 먹어도 힘들고.
그런데 우리 개님들이 참 기특한 구석이 하나 있다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밥은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는다는 것이다. 너무 급하게 먹어서 체할까 봐 걱정은 되지만, 식욕을 잃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한층 안심이 된다.
나는 사료비를 벌고 너희 똥을 치울 테니까,
앞으로도 너희는 그냥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