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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Sep 23. 2021

분리불안증이 있어요, 개 말고 저요

개랑 거리두기를 하라고?

"너무 붙어있지 마. 개랑도 거리두기가 필요해."

평소와 다름없이 개님을 무릎에 모시고 노트북을 하는 내게 동생이 말했다. 처음에는 거리두기라길래 나 같이 거리두기 잘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반문할 뻔했다.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가는 탓에 전 날 밤에 걸어둔 현관 걸쇠가 다음날 밤까지 걸려있는 마당에 또 무슨 거리두기를 하라는 거냐고.

일명 개통령 강형욱 씨의 말에 따르면 늘 개를 끌어안고 어디든 붙어 다니는 건 '과잉보호'라고 한다. 보호자가 반려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받아주면서 사회성과 독립심이 결여되고 개는 내부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과잉보호도 결국 일종의 학대에 속한다.




애미야, 등이 좁다

모모와 콩이가 손바닥만 하던(정말로 손바닥에 두 마리를 모두 올릴 정도로 작았다) 쪼무래기 아기 시절. 나와 동생은 늘 개들을 금이야, 옥이야 안고 다녔다. 엄마는 우리가 개를 안고 집을 돌아다닐 때마다 "지 발로 걷게 좀 냅둬라!"하고 잔소리를 해댔다. 우리는 그때만 개를 내려주고 다시 엄마가 보지 않을 때는 개를 안고 다녔다. 그때는 산책도 자주 하지 않을 때라서 어쩌면 진짜 개가 걸어 다닌 날보다 안겨다닌 날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개를 계속 안고 다니면 독립심이 없어진대."

며칠 전, 내가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으니 모모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같이 서 있길래 자연스럽게 들어 올렸다. 가슴팍에 손을 넣고 엉덩이와 뒷발을 받쳐서 천천히 들어 올려 어깨에 앞발을 안착시키면 안김 포즈 완성이다. 그런 나를 본 엄마가 한 말이다. 우리가 개의 독립심을 다 버려놨다며.


나도 안다. 너무 개를 물고 빠는 것도 좋지 않은 짓이라는 걸. 하지만 의자에 앉아있으면 의자에 매달리고, 바닥에 앉으면 무릎 위로 냉큼 올라오고, 침대에 누우면 옆구리를 파고드는 요 깜찍한 것들을 어찌 밀어낼까.

때론 단호하게  된다고 혼자 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깨너머로 삼국지를 같이 읽었는지, 삼고초려도 아니고 받아줄 때까지 찾아온다. 그렇게 거절하고 돌려보내길 수차례, 땡그란 눈으로  표정을 살살 살피는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그러면  미세한 얼굴 근육을 살피던 녀석들은 " . 귀여워서 당장 안아주고 싶지?" 하면서 이부자리를 펴라는  다리를 긁는다. 그럼 나는 하는  없이 무릎을 내어준다.

오히려 개가 옆에 없으면 불안한 건 인간 쪽이다. 분리불안증은 내가 더 심하다.

옆에 누워있다가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라치면 어디 가냐고 질척거리고,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냅다 이름부터 부른다. 화장실에 들어갈까 봐, 아무 데나 핥다가 이상한 거라도 주워 먹을까 봐. 이유야 다양하지만 실은 내게서 개가 떨어지는 순간부터, 내 눈에 개가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불안한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생활 패턴이 바뀌고 외출할 일이 거의 없어진 탓에 서로의 분리불안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 개에게 기꺼이 온몸을 침대 삼아 눕도록 내어주는 것 외에 내겐 선택지가 없다.


사실 개에게도 본인만의 시간은 중요하다. 나와 너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동등한 입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혼자 시간을 보낼 줄 알아야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해진다. 나만의 시간, 남과의 시간을 적절히 조절하며 살아가야 보다 풍요로운 삶이 된다.

개들이 혼자 있을 권리를, 내 멋대로 '보호'라는 이름 아래 빼앗아버린 건 아닐까?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날이 많아져서일까. 타인과의 만남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나를 돌보는 시간이 늘어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개의 세상에는 온통 우리 가족밖에 없다. 물론 사람도 개가 없으면 힘들겠지만 살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개들은 우리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내가 개들을 그런 삶으로 내몬 것이다. 작은 창살에 가둬놓고 그 안에서만 숨 쉬도록, 내 품을 떠날 수 없게.


이걸 어떻게 안 안아줍니까?

엎질러진 물이라고, 이미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는 사이, 개는 아주 늙어버렸다. 마음은 준비가 안 됐지만 머리는 다 알고 있다. 이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언제 갑자기 이별할지도 모르는데 독립심을 키우겠다고 내 품에서 떼어놓는 건 더 가혹한 게 아닐까 생각도 든다.

당연히 개들에게 자유의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개와 사람 간의 거리두기를 위해 조금씩은 조절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때론 견디지 못하고 슬피 우는 녀석에게 다시 팔을 활짝 벌려줄 수밖에 없다. 개를 이렇게 만든 게 내 잘못이라면, 그 책임을 다 하는 것도 내 의무는 아닐는지.

내 품이 아니면 안 되는 삶을 만들었다면, 죽을 때까지 내 품을 내어주는 수밖에.




이렇게만 읽으면 무슨 개와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지낼 것 같이 보이지만, 나름 안 된다고 할 때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다. 풀이 죽어있기는 하지만, 개도 누구 무릎을 벗어나 혼자 누워있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내가 자세를 바꾸면 냉큼 달려와 무릎을 차지하긴 하지만. 내게 개와의 거리두기를 강조했던 동생도 지금 노트북을 하면서 개를 무릎에 안고 있다.

역시, 분리불안은 보호자가 겪는 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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