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추스리기 위한 티타임
어떤 환자가 있었다.
그는 심각한 편두통을 앓았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소용이 없을 만큼 극심한 두통이었다. 큰 병을 앓고 있나 두려워진 환자는 병원에 가서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의사도, 어떤 기계도 그의 병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없었다. 모두 그가 정상이라고, 아무런 병도 앓고 있지 않다고만 말했다.
답답한 환자는 수소문 끝에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의사를 찾아갔다. 그는 의사를 붙들고 앉아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다. 두통은 날로 심각해지는데 병명도 없고, 이젠 약도 들지 않을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며. 환자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그의 머리를 살펴보지도 않고는, 갑자기 서랍에서 비밀스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 어떤 병이든 낫게 해 줍니다. 아주 강력한 약이지요.
이걸 먹고 효과를 보지 못한 환자는 없었어요.
이 약을 처방해드릴테니 며칠 먹어보시고 다시 병원에 오세요.”
싱글벙글 약을 받아 들고 돌아간 환자는 며칠 만에 의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정말로 두통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며 의사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약은 대체 무슨 약이죠?’ 궁금해진 환자가 의사에게 물었고, 의사는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사실 그건 꿀에 탄 밀가루입니다.
당신이 아팠던 이유는, 당신이 계속 아프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제 약을 먹고 나은 것 역시 나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도 희미한 옛날 얘기다. 지금 돌이켜보니 뭐 이런 돌팔이가 다 있나, 싶다. 사기행각도 모자라 피해자에게 고리타분한 교훈까지 주려고 들다니. 양심도 없지. 한편으로는 저 이야기를 듣고 환자는 다시 아프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철석같이 믿었던 약이 고작 ‘꿀에 탄 밀가루’였다니. 그 말을 듣고 나면 다시 두통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며 나는 이야기 속의 환자를 걱정했더랬다.
내가 이유 모를 불안함에 시달리거나 슬픔에 몸부림칠 때마다 이야기 속 돌팔이는 툭툭 튀어나와 내게도 그 비밀스러운 약을 처방해주었다. 내 안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날 괴롭히고 생채기를 내고 나면, 나는 마다하지 않고 약을 받아 들었다. 쭉 들이키고 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던 고통도 어느샌가 사라진 후였다.
돌팔이 의사가 항상 내게 건네주는 ‘꿀에 탄 밀가루’는 내가 그간 써온 글이다.
예전에 작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작가님은 일기 비슷한 걸 써오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모두가 돌아가며 자기 글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한 학생이 글을 읽는 도중에 ‘새벽이면 늘 내 글이 전부 쓰레기 같이 느껴져서 저장했던 모든 글을 지워버린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작가님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자기 글이 쓰레기 같죠? 왜 글을 지우죠?
절대 글 지우지 마세요.
언제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글을 왜 지워요?”
나는 걱정도, 고민도 많은 사람인지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언제나 대비하곤 한다.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우울의 폭풍에도 늘 경계태세를 갖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의 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리에 주저앉아 모든 게 망가지는 걸 우두커니 지켜보는 것뿐이다. 언제나 내가 생각한 강도를 뛰어넘는 폭풍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글만큼은 절대 삭제하지 않도록 나는 틈틈이 심신을 단련해왔다. 비바람이 아무리 두들겨도 절대 열리지 않는 땅 속 깊은 방공호에 고이고이 내 글을 모셔놓는다. 난 어딘가에 비상 파일을 저장하거나 옮겨놓지 않는 한, 절대 글을 삭제하지 않는다. 그저 낙서처럼 끼적인 메모일지라도.
꼭 그 작가님이 하셨던 말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 치고는 내게서 나온 생산물들을 퍽이나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렇다. 차라리 작가가 되길 포기하라면 또 모를까, 내가 썼던 글을 지우라고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그 세계관을 사랑한다. 나는 사랑하지 않을지언정, 그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이 사는 세상은 사랑한다. 글을 지운다는 것은 내게서 살아 숨 쉬는 이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을 없애버리는 것과도 같기에, 유일하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도 사라지는 것이기에, 난 내가 써온 글들을 지울 수 없다.
들숨에 질투하고 날숨에 좌절하는 나쁜 버릇이 발현될 때마다, 의사는 항상 내게 케케묵은 옛날 글을 찾아가라고 권유한다. 당장 할 일이 쌓여있다고 구시렁대면서도 파일을 열고나면 어김없이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잔뜩 널브러진 이삿짐 속에서 앨범을 발견한 사람처럼, 할 일을 잊어버리고 이 글을 쓰던 때의 감정과 생각에 젖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글이건 내가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이 많은 글자를 써냈다는 사실이
제법 위로가 된다.
그건 '내가 마냥 놀고먹고 싸는 원초적 행위만 하지는 않았구나'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다. 그 후에는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남의 문장들이 내 과거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에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즐거워진다. 내가 나를 저평가하는 것에 비해 은근히 잘 해왔다는 것이 나의 자존감을 한 층 업그레이드해준다.
이렇게 내가 남을 질투하고 좌절에 빠지는 과호흡을 깜빡한 사이, 의사는 나 몰래 희망이라는 주삿바늘을 꽂아놓는다. 연결된 링거액은 일종의 진정제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의지가 많이 함유된 것으로, 팩 하나를 다 맞고 나면 어느새 우중충한 감정들은 말끔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여느 때와 같이 이 과정을 반복하고 보니 상당히 우스웠다. 미래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이 위안을 얻기 위해 굳이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의 나’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일이니까.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현재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너무 빡빡하게 살아가는 나머지 종종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 남은 채,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지를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이따금씩 뒤를 돌아봐야 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가끔씩 내 글을 읽으며 헤죽거린다. 아무도 내가 잘났다는 걸 몰라줄 때는 나라도 알아줘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건 조울 기간에 하는 현실도피성 과대망상과는 다른 양상의 건강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망상은 실체가 없지만
이 명상에는 내가 직접 만든 실체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쨌거나 내게 적절한 처방을 해주었으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사가 제멋대로 날 진단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매번 의사를 찾은 것도, 약을 처방해달라고 징징거렸던 것도 내 쪽인 듯하다. 이 기회를 빌어 당신을 돌팔이라 했던 경솔한 언행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말을 건넨다.
물론 다시 아플 수는 있겠지. 잔혹한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에. 세상은 절대 우리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늘 우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세뇌시키려 들 것이다. 그러니 환자는 언제고 다시 두통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아니, 무조건 다시 아플 것이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나는 이제 스스로 아프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믿는 것이다. 이 약을 복용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임을, 나는 괜찮아질 것임을. 세상이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으면 되었다.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내 창고에는 언제나 밀가루와 꿀이 가득 채워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