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유예된 죽음

소설 [진이, 지니] 리뷰

by 담작가
진이, 지니_줄거리

침팬지 사육사 이진이, 그녀는 킨샤사의 작은 가게에 비를 피하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작은 암컷 보노보(침팬지보다 덩치가 작은 영장류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를 가진 개체)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상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것이 함정. 보노보는 작은 철장 우리에 갇혀 있었다.

밀렵꾼들이 보노보를 잡아 팔아넘기는 장면의 일부를 우연히 목격하게 된 진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보노보에게 다가간다. 가지고 있던 파인애플을 건네며 눈을 맞추며 보노보를 달래는 사이 밀렵꾼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내 보노보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고, 신고조차 하지 못한 채 귀국한다.

오랜 기간 쌓아온 경력과 연구들을 포기한 채, 그녀는 영장류센터를 그만두기로 한다. 자신은 이들을 돌볼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던 와중 비오는 날 밤, 스승과 함께 화재현장에서 날아온 침팬지 구조요청에 달려가게 된다. 거기서 만난 것은 보노보. 그녀는 보노보를 구조한 뒤, 스승이 운전하는 벤에 몸을 싣고 가다가 큰 사고를 당한다.

눈을 떠보니 기억나는 것은 사고당시 자신의 모습. 다행히 많이 다치지 않았는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예를 들자면, 나무를 비인간적으로 잘 타고, 자신이 네 발로 걷고 있으며, 사람의 언어가 아닌 보노보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 보노보의 몸 속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법을 갈구하게 되는데...


죽지 못해 사는 삶_소설에 대하여

나는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운다. 벌써 우리 가족과 9년째 함께 살고 있는 이 작은 개체들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안겨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사랑이고, 그와 비례하는 만큼의 책임감이다.

언젠가 한 마리가 위의 썩은 일부를 떼어내는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눈을 뜬 이 작은 생명에게 우리는 감사함과 동시에 큰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 수술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우리 때문이었다는 것. 나에겐 겨우 마음의 고통이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메고 있던 녀석의 몰골을 떠올리자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작은 머리끈 때문이었다. 전화선처럼 꼬불꼬불한 실리콘 머리끈을 우리는 아무렇게나 던져놓았고, 이 아이는 아무 생각없이 주워먹은 것이다. 그 머리끈 하나가 아이의 조그만한 위장의 3분의 1을 썩게 만들었다. 인간이 버리는 쓰레기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야생동물들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면서, 내 집 안의 작은 생명에게는 그토록 무신경했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진이 그녀는 자신의 무력감을 뼈져리게 느꼈다. 보노보의 몸 속에서, 이 보노보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생각한다. 보노보의 몸에 갇힌 영혼이라고 할 지라도 그녀는 살아있었다. 비록 '인간 이진이'의 몸은 기계에 의존해 병원 침대에 누워있지만, 그 영혼만은 살아서 '보노보 지니'의 몸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니의 진짜 영혼'가 앉아있던 방석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말이다.

죽어가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자신이 맞이할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고민한다. 삶에 대한 본능적인 미련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이내 '지니'에게 이미 많은 것을 빚졌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돌아가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지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따위'가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삶의 의미' 같은 거창하고 역겨운 인간중심적 사고의 종착역이 아니다.

하늘이라는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동등하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도 그저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매일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삶에 대한 미련이자, 본능이다. 결국 살기 싫다고,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불평불만하면서도 인간은 삶을 놓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합리화의 달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갈 구실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조금씩 '구실'을 쌓아가다보면 '삶의 목적'이라는 것도 생기고, '삶의 이유'라는 것도 생기더라. 그게 개개인의 삶을 의미있고 알차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것들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삶을 대변하는 문장이요, 삶의 진리이다.


삶을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다면, 죽음이라도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싶다고 울부짖던 지난 날의 내가 떠오른다. 그 때의 나는 삶의 무력감에 분노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분노했던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살고 싶은데, 죽음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에 분노했다. '살고 싶은데, 죽고 싶어지는 감정에 대한 억울함'을 느꼈다.

그 때의 나를 말렸던 건 누구일까. 친구도, 부모도, 그 어떤 글도 나를 쓰다듬지 못했다. 비현실적이지만 나는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달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 살아보자고, 이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지만 언젠가 나도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죽음으로 날 몰아넣던 저것들에게 비웃음을 날려주자고. 그런 오기와 악다구니로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 물론 죽음은 급격하고 예의없게 어느 순간 성큼 다가온다. 그렇기에 지금의 삶의 의미없는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문제라고, 엘리아스는 말했다.

'죽고 싶다'는 말 뒤에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숨겨져있다. 살아있는 한, 살아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듯이, 살아있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자거나,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국 죽을 것이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만큼만 치열하게 살아보자는 이야기다. 그건 내 '죽음에 대한 목표'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이만하면 죽어도 되겠다, 그래 이 정도면 나 열심히 잘 살았다'라고 웃어버리고 죽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 작가는 그런 모든 이에게 그저 한 순간 삶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삶은 유예된 죽음_감상평

정유정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은 참 세련된 감동을 준다. 눈자위가 벌겋게 물들었을 때, 눈물을 흘리기 직전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야말로 깔끔하고 신사적인 소설이다.

위로라든가, 이해못할 희망이라든가. 그런 것보다야 내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길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후회하지 않을 삶의 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삶이 지겨워서, 삶보다 죽음이 나을 것 같아서, 그 외에도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원하고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죽음은 너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경로로 들이닥칠 거야. 그 때까진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게 우리네 운명인 것 같아.

왜냐하면 삶이란 놈이 아주 끈질기고 쿨하지 못한 놈이라서 말이야.

그래도 살다보면, 살아있으니까 어쨌든 살아가다 보면은.

'아직은 죽지 않아서, 죽기 전에 이런 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라고 생각할 날 오지 않겠어?

죽음이 다가와서는 '이야, 너 되게 잘 살았다. 이제 가자!'라고 쾌활하게 말 할 때,

'마! 내가 말이야~'라고 꼰대질 할 수 있게 악착같이 살아보는 게 어때?

죽음이 마지못해 데려가는 바람에 둘이 저승길마저 숨막히게 걸어가는 것 보다야, 같이 손잡고 걸어가는 게, 죽어서 더 편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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