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남긴, 다시 돌아가지 못할 그때를 돌아보며
오늘도 영하의 날씨다.
오전 내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몸이 흐린 하늘처럼 무겁다. 뭉친 근육도 풀고 생각도 모을 겸 걷기로 했다. 안에서 보는 것과 달리 바깥공기는 쨍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운한 맛도 난다. 겨울 맛이다.
해찰하기 좋은 혼자 걷기다.
오늘은 하천의 새들을 살펴봐야겠다. 지난 1월 초에 처음 본 깝작도요새가 오늘도 그 자리에 있는지, 청둥오리 개체수는 얼마나 늘어났는지, 다른 나그네새가 또 있는지. 아는 만큼 이름을 불러주고 모르면 나만의 방법으로 통성명하면 된다.
지난밤에도 눈이 내린 모양이다.
그늘진 오솔길이 하얗더니 실개천 한쪽 음지에도 눈이 쌓여있다. 눈을 보는데 어디선가 ‘삑삑’ 소리가 난다. 살금살금 물가로 가보니 오늘도 깝작도요새 한 마리가 머리랑 꼬리를 상하로 흔들고 있다. 부리를 물속으로 넣으면서도 리듬은 놓치지 않는다. 타고난 무용수 같다. 깝작도요새는 봄과 가을에 우리나라를 거쳐 가는 나그네새라는데, 아무래도 길을 잃었거나 텃새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인가 보다.
오늘도 하천은 흰뺨검둥오리들 세상이다.
늘 보다 보니 나도 특별한 줄을 모르고 새들도 내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안다. 따로, 또 같이 그저 물 위를 미끄러져 가거나, 둑 위에서 풀씨를 쪼아 먹거나 한다. 한 무리는 양지에서 조는지, 쉬는지 자울자울하고 있다. 왼편 논에서는 비둘기 떼와 큰기러기무리가 영역을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들만의 구역에서 평화롭다.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내가 더 놀랐다. ‘발소리가 크지도 않았는데, 예민한 오리구나.’라고 생각했다. 낮게 날아간 새는 오십 미터쯤 앞 물 위에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그런데 흰뺨검둥오리가 아니다. 부리도 다르고 털 색깔도 다르다. ‘넌 누구니?’ 물음표를 던지며 가던 길을 멈췄다. 가만히 휴대전화기 카메라로 멀리, 가까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세 개의 다리를 돌아 집으로 오는 동안 같은 새를 서너 마리나 만났다. 모두 소리에 민감했다. 찾아보니 쇠오리란다. 반갑다, 쇠오리.
며칠 만에 청둥오리 개체수가 제법 많아졌다.
멀리서 봐도 빛나는 녹색 머리 아래 가느다란 하얀 스카프를 맨 수컷 모습이 눈에 띈다. 청둥오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친정엄마가 생각난다. 한때 제부는 엄마를 ‘청둥오리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언젠가 엄마가 달력을 오려 만든 메모지에 청둥오리 이야기를 써둔 걸 보고 나서부터였다. 지금은 침대 위가 엄마의 온 세상이니, 지나간 그때가 꿈만 같다.
동화천의 쇠오리?!
역전들 실개천의 깝작도요새?!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엄마의 일기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눈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 창문 열고 내다보니 날이 흐렸다. 비가 온다고 해서 안 갈 수도 없고 걱정하고 있는데 태안서 전화가 왔다. 눈비가 오후에 온다고 나중에 만나자고. 그래서 나는 무척 좋았다. 아침밥을 먹고 자리에 누워 잤다. 일어나니 11시가 되었다. 그래서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하는 데 누가 왔다. 그래서 끊고 불을 돌리고 창문 열고 내다 보니 눈이 보슬보슬 제법 쌓였다. 논을 쳐다보니 청둥오리가 까맣게 앉아 모이를 찾아 부지런히 먹고 있었다. 새들이지만, 그 작은 머리를 잘 쓴다 생각했다. 두렁 맛슬 오고 가며 먹이를 잘 먹고 있었다. 6시가 넘도록 갈 줄 모르고. 그러다 보니 갈 준비를 하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까이 와서 보니 제법 크다. 나를 때는 작아보였는데 어디가 자서 잘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 와서 엄마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2009년 2월 19일 일기에 청둥오리 이야기가 있다. 창문 앞이 바로 논이라 나그네새들이 자주 하늘을 덮고 논을 메운다. 이웃들과 함께 새들이, 늘 혼자인 엄마의 적적한 시간을 따뜻하게 해줬나 보다.
혼자 익힌 한글이라 더 특별하다. 끊임없이 머리를 써야 한다며 적은 일기, 이제 16년 전 엄마의 봄 한 철을 톺아봐야겠다.
2026. 0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