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스테리 May 27. 2022

새하얀 떡국

다시 처음부터

아이는 나의 그것을 닮지 않았다. 그녀의 입맛은 아주 까다롭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극명하며, 음식의 컬러, 질감, 온도 등에 상당히 민감하다. 그래서 공들여 만든 음식을 몇 숟가락 뜨다 말고 일어나는 경우가 빈번하고 팅팅 불어버리고, 식어버린 것은 언제나 내 차지.


그렇게 비유 맞추기 까다로운 그녀도 항상 '꿀떡꿀떡' 잘 먹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떡국'이다


새해에 나이 한 살 먹는 기념으로 먹는 게 떡국인 줄 알았지 이렇게 나이 먹는 게 아쉽고 아까운 40대 중반에 하루가 멀다 하고 떡국을 끓이게 될 줄이야.

그럼에도 1일 1 떡국을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육아는 시간과 체력 싸움 아니겠는가?

떡국은 맵지 않아 아이, 어른 두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어 두벌의 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과 아침에 떡국을 먹었다면 점심에는 떡국에 야채와 김가루, 찬밥을 넣어 죽을 만들어서 한 끼를 또 해결할 수 있다는 엄청난 효율이 있으니...

나이를 골백번 더 먹는다 해도 자꾸 끓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떡국을 끓인다. 새하얀 떡국이 보글보글 끓으면서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나도 가끔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싶다. 의식을 비우고 땀을 사방에 뿜어대면서 음악에 온몸을 맡기고 흔들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복잡하게 많은 생각들이 다 비워져 가볍고 자유로워질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은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소리가 나고, 목이 40도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43세 노산의 영광스러운 흔적 이리라.


그렇게 끓는 떡국을 보며 몸이 안되니 마음만 출렁거리다, 떡국을 담아내고 아이에 입속에 '호호~' 불어서 넣어준다. 아이가 입을 '쫙쫙' 벌려 야무지게 받아먹을 때 나는 천국의 환희를 경험한다. 그렇게 잘 먹이고 나면 큰 과제를 하나 해낸 듯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음 끼니는 남은 떡국 국물로 죽을 대충 해먹이면 되니 홀가분하다.  


밥도 아닌 것이 간식도 아닌 것이 신통방통하게 큰일을 해낸다. 내 입장에서 떡국은 참 유용하고 기특하다.




떡국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일도 아닌 것이 놀이도 아닌 것이 주었던 유익이 생각났다.  

정말 치열하게 일하던 서른두 살쯤 매일 새벽 출근과 야근에 몰아치는 강도 높은 업무로 결국 번아웃이 왔다. 그때 우리 팀장은 사납기로는 동네 사냥개 수준이었고, 괴팍하기로는 히틀러가 동생 삼아도 될 정도였다. 마침 아주 아주 중요한 기획 회의가 있었는데, 나는 사전 공유도 없이 무턱대고 불참했다. 절대로 불참하면 안 되는 회의였지만 머리에 꽃 꽂고 산에 올라가 춤이라도 출 정도의 정신상태였기에 아마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책상에 앉아 의자를 뒤로 한참 젖힌 채 여성 잡지를 보고 있었다. 내 위 과장님이 급하게 달려오셨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뭐해? 빨리 들어가자.."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계속 잡지를 보았다. 과장님은 이 얼토당토 안 한 상황에 많이 당황하신듯했다. "아...."라는 외마디 여운남 남긴 채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사냥개, 히틀러 팀장이 곧 나와서 '그따위 멋대로 굴 거면 그냥 퇴사해!'라고 소리를 지르며 곧 몰아칠 것이다. 그러나 난 오늘이 설사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일지라도, 아니 어쩌면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라도 그만 이 고단한 일들을 내심 모두 놓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긴 회의가 끝났고 팀장이 내 자리로 걸어왔다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마음이었고 솔직히 약간은 무서웠다. "빨리 집에 가... 가서 좀 쉬어라 며칠도 좋으니까 그냥 쉬고 와" 예상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의 지침은 달콤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가방을 싸서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내리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강남역 교보문고로 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리고는 책 몇 권을 사서 하루 종일 교보문고 1층 커피숍에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기를 3일째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토할 것 같았고 도망가고 싶었던 일이 다시 하고 싶어 졌다. 는 것이다.

분명 꼴도 보기 싫었던 일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는데 급기야 일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사회 초년생 첫 입사 때의 그 묘한 설렘까지. 올라오는 것이다. 도무지 뭘 했다고 사람 마음이 어찌 이리 다른 세상이 되는가?! 그저 밀린 잠을 자고, 혼자 커피숍에 박혀 며칠 책을 읽었을 뿐인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여행을 떠난 것도, 생각의 터닝포인트를 줄 엄청난 세미나를 참여한 것도 아닌 일상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작은 쉼표 만으로 매너리즘과 번아웃에 나가떨어진 나의 영혼을 다시 구원할 수가 있었다.


사흘 만에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회사로 출근했고, 무서운 팀장도 나에게 그 일에 대해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알았던 걸까? 그냥 저 아이는 쉬게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것을... 아님 삐딱하게 엇나가버려 순간 통제 안 되는 어린 직원이 너무 당혹스러웠던 걸까? 이유가 어찌 되었건 그 순간의 그가 취한 방식은 훌륭했다.


때로는 번아웃으로 몸과 마음이 안드로메다로 가기 직전 복잡하게 헝클어진 그림을 잠시 멈추고,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하얀 도와지가 필요하다. 마치 연습 종이 같은 것이랄까?

하얀 도화지에 느긋하고 편안하게 끄적이다 보면 뭐 대단하고 엄청난 것을 하지 않아도 다시 실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진다.  




그렇게 새하얀 떡국은 육아에 허덕거리는 나를 잠시 한 끼 숨 돌릴 수 있게 해 주었고,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긴장 없는 단 몇 시간의 연습 도화지가 되어준 샘이다.


너무 한참만에  아니라, 잠깐씩이라도 멈추고 쉬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을 온전히 잘 그려낼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밥을 폭식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