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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만 제이 Sep 10. 2020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고뇌하는 그대에게

우리 함께 멋진 꿈을 꾸어요~

"He who has why to live can bear almost any how."

무엇을 위해,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삶에 있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견뎌 낼 수 있다. (니체, 독일의 시인, 철학가)


출처: Pixabay


"얘야, 넌 꿈 (혹은 장래희망) 이 뭐니?"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듣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기 위해 누구든 한 번씩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는, 남자애들은 의사, 변호사, 판사, 대통령... 여자애들은 피아니스트, 교사, 현모양처... 세상의 직업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것 같았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SKY 입학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입학)... 대학시절에는 대기업 취업...

 

예가 너무 진부한가? 도대체 이 아재는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겨? 하는 독자들의 마음의 목소리가 이곳 자카르타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자 그럼, 21세기 스타일로 생각해 보자. 초등학생이라면 유튜버 아니면 한류스타, 셰프... 중고등학생도 유튜버 아니면 한류스타, SKY 입학... 대학생이 되면 좀 현실적 감각이 생겨서 유튜버 아니면 공무원...


대충 이쯤이지 않나? 누군가 나에게 꿈, 장래희망, 인생 목표를 물어주고, 스스로도 자문하는 것이 끝나는 시기가... 사회인이 되면 결혼, 슈퍼개미 (주식투자), 혹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서울에 집 사기, 매일 퇴사를 꿈꾸며 출근하는 아침... 꿈꾸는 시절은 끝나고, 현실에 맞춰 최대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그랬었다. 어릴 때는 꿈도 수시로 변해서, 전자오락실 사장, 뉴스 앵커, 홍콩스타 (요즘은 한류스타가 대세지만) 같이 뜬구름 잡는 망상을 하다가,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흔히 모두가 생각하는 "서울대 입학"으로 현실화(실은 완전 비현실화) 되었다.

중고등학교 6년 중 무려 3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인생 절친 철욱이와 함께, 서울대 입학이란 공통의 목표를 향해, 방과 후에는 매일 같이 대구 중앙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아직도 대구 중앙도서관의 면과 국물을 따로 만들어 놓고, 주문 들어오면 면에 국물을 부어 바로 내어주던, 500원짜리 그 꼬들꼬들한 라면의 맛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는 당시 유행하던 하버드 의대생의 일상을 그린 "닥터스"라는 소설을 읽고, "의대 입학"으로 꿈이 바뀌어 이과에 진학했다. 그때는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머리가 안 좋은 건지, 공부하는 요령이 안 좋았던 건지, 아니면 둘 다 안 좋았는지 "서울대 입학"과 "의대 입학"이라는 꿈은 어느 쪽도 달성하지 못했다.


학력고사 마지막 해, 이유는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고3 시절 나의 성적은 "날개 없는 새"처럼 추락했고, 결국 학력고사를 치고 들어간 곳은 지방대 공대. 중고등학교 6년간 "서울대 입학" "의대 입학" (기왕이면 서울대 의대 입학)이라는 확고한 목표를 향해, 혹시 사춘기 소년 가슴에 바람날까 봐 이쁜 여학생 얼굴도 한번 안 쳐다보고 다람쥐 챗바퀴처럼 공부만 했던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도 없는 비참함과 자괴감이 밀려와 괴롭고 허탈했다. 지방대 공대를 결코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6년간 품어 왔었던 꿈과 그 결과와의 괴리가 너무 커, 만 스무 살도 안된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 허무했던 6년 (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나는 대학 2년을 정말 미친 듯이 연애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시고 놀았다.


그러다가 또 한 번 내 인생의 전환점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벌써 공대 2학년이 된 1994년, 전공필수 과목이었던 물리 화학 시험을 무려 빵점을 받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정신 차리고 며칠을 밤새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교수님께도 불려 갔다. 학과 100명 중 빵점은 나 하나란다. 애당초 영어와 국어를 좋아하고, 수학과 과학은 좋은 점수를 별로 받아보지 못했던 천상 문과 체질의 내가, 의대 가겠다고 "하면 된다!"만을 가슴에 되새기며, 책상 앞에는 “샤”라고 쓰인 서울대 사진을 붙여놓고, 이과를 선택한 것이 정말 크나큰 실수였다는 것을 정말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벼...'


교수님 연구실에서 나와, 나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문과로 전향해야겠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새로 들어가는 건 삼수가 되는 건데, 새로 생긴 수능이 뭔지도 모르고, 2년을 열심히 놀고 마셨더니, 구구단도 아련해진 머리로 뭘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불안도 있었지만,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물리 화학이 아니라 인생이 빵점이 될 것 같다는 공포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내가 싫어하고 잘하지도 못하는 걸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때는 그게 제일 무서웠다.


출처: Pixabay


1994년, 내 나이 딱 만 20세에 비로소, 진정한 "꿈, 혹은 장래희망, 혹은 인생 목표"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뭐지?'

'내가 잘하는 건 뭘까?'

'왜 그걸 하고 싶은 걸까?'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런 고민을 몇 날 며칠 하다가 내린 결론...


"세계를 누비는 비즈니스맨이 돼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남들이 못 하는 경험을 하면서 살자."


드디어, 나의 꿈이 "명사형 단어"에서 "서술형 문장"으로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무엇을"과 "왜"를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원래 영어를 워낙 좋아해서, 대학 입학과 함께 영어회화 동아리에서 활동했었는데,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한국인 외의 문화적 배경도, 외모도, 사상도 모두 다른 다양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겁게 느껴지던 때였다. 당시에는 대구에 외국인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지나가던 외국인에게 괜히 말도 걸고 그랬었다. 그럼, 그걸 직업으로 해서 즐기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였다. 우선, 당시 고3이던 여동생에게 수능이 뭔지 물어보고, 몇 달 남지 않은 수능 공부에 돌입했다. "세계를 누비는 비즈니스맨이 돼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남들이 안 하는 경험을 하면서 살자."를 실현하기 위해, 제일 그럴듯한 학과를 찾아봤다. "무역학과"라는 게 있었다. 영어로는 "Department of International Trade"... 겁나게 폼난다. 와우! 바로 이거다! 딱이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95년 경북대학교 무역학과에 중고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뭐라고 딱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희한하게 나는 수능 체질이었다... 꽤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만약, 아직 암기 중심의 학력고사 시절이 이어졌었다면, 아마 내 인생도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이후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하면 된다"에서 "운칠기삼"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무려 25년이 흘러, 2020년 현재, 나는 일본 5대 종합상사의 하나인 스미토모 상사의 주재원으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4년째 근무 중이다. 스미토모 상사가 출자한 자동차 비즈니스 관련 회사의 대표이사 겸 다른 2개 자회사의 이사로서, 서로 다른 4개의 비즈니스를 총괄책임지고 있다.

뒤돌아보면, 25년 전에 세운 나의 인생 목표를 항상 기억하고, 실현하기 위해 한 걸음씩 조금씩 전진해 온 결과가 어느 순간 나를 자카르타까지 데려와 주었다.

그래 봐야,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이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목표를 실현해 왔다고 자부하고 만족하며, 스스로 세운 목표를 더욱 견고한 현실과 미래로 실현하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하고,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적어도 60세에 퇴직하는 그날(혹은 65세까지 연장 근무할지도 모르지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뭔가 새로운 꿈을 꾸고 싶다는 싶다는 욕망이 가슴을 뛰게 했다.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게 뭔지 정의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슴 뛰는 뭔가를 다시 하고 싶다?' '종합상사맨으로 충실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외에 더 값진 일은 없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길 약 2년... 또 느닷없이 하나의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누군가의 인생에 이소룡이 되자." 내가 생각해도 마흔도 훨씬 넘어 쉰을 바라보는 아재의 "꿈" 치고는 참 뜬금없다.


출처: Pixabay


이소룡, 혹은 Bruce Lee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 같다. 50여 년 전에 사망한 무술인이자 영화배우였던 이 중국인 한 명이 내 인생에 여러모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이다. 물론 엄마 다음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이소룡을 동경해 왔다. 마흔도 훌쩍 넘은 지금도 그는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준다.

이소룡은 어린시절 홍콩에서 건달처럼 자랐지만,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을 배우면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수천년 역사의 쿵푸라는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복싱, 태권도, 카라테 등의 경쟁무술의 장점들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무예인 절권도를 완성했으며, 매일매일 10시간 이상 트레이닝을 하며 자기관리를 했으며, 온 몸이 근육덩어리인 반면 수많은 명언을 남긴 사상가로서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단련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인종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흑인이 중심이 되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동양계 유색인종은 70년대까지 흑인보다 더, 혹은 흑인에게마져 차별 받았던 소수집단이었다고 한다. 그 차별과 멸시속에서도 그는 확고한 꿈을 가지고,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헐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된다. 지금의 미국내의 동양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이소룡이 심어 놓은 이미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 이소룡처럼 죽어서도 수십억 명의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더라도, 내 이야기가 단 한 명일 지라도 어느 누군가의 삶에 힌트가 되고, 희망이 되고, 나침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꿈 시즌2" 가 만들어졌다. 요즘 말로 이른바 "인플루엔서 (influencer)"와 비슷하지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슈퍼스타가 돼서, 돈과 명예를 얻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있으면 땡큐지만...)




마흔 중반에 새로 세운 "꿈 시즌2"를 실현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역시 내 이야기를 정리해서 책을 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목표 달성 방법은 초고를 정리해서 출판사의 문을 열심히 두드려 보겠다는 것이었다. 될 때까지...


그런데, 대충 목차를 만들고, 정신없이 살아가면서 틈틈이 글을 쓰긴 썼지만, 마감일이 없으니, 좀처럼 초고가 완성되지 않은 채 2년이란 세월이 훅 가버렸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최서정 씨의 "나는 대한민국 상사맨이다"를 읽고, 최서정 씨가 출판까지 하게 된 계기가 "브런치"라고 하여, 브런치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여담이지만, 처음에는 최서정 씨가 무슨 요리 사이트에 투고한 줄 알았다.)


브런치 사이트를 방문하고는 흥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거다! 기승전결이 한방에 끝나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주 한 편씩 찔금 찔금 보여주는 연속 드라마처럼 글을 쓸 수 있구나!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바로, 브런치 아이디를 만들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책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꿈 시즌 2의 테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만 46살이 되어 "쉰 즈음에" 내 인생을 한 번은 돌아보고, 반성하고, 새로운 사고를 스스로 정립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나라나 동양의 사고는 전체를 반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1학기/2학기, 전반전/후반전, 후라이드 반/양념 반, 짬짜면... 하지만, 서양에서는 전체를 4개로 나누는 방식도 많이 사용된다. 쿼터 (Quater)라는 방식이다. 학기도 4 쿼터제를 쓰는 곳이 많고, 미식축구나 농구도 4 쿼터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이스크림 가게인 베땡땡 라땡땡의 메뉴에도 4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같이 주문할 수 있는 "쿼터"라는 메뉴가 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니, 태어나서 공대 중퇴, 전과를 결심한 스무 살까지가 1 쿼터, 수능시험을 치고 무역학과로 전과, LG에 입사해 해외영업을 하다가, 무일푼으로 유학가 MBA 학위를 받고, 종합상사에 근무하게 된 지금까지가 2 쿼터인 것 같다.


햇수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행동양식이 1 쿼터와 2 쿼터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인생 100세 시대"... 내가 1 쿼터, 2 쿼터를 지나오면서 겪은 일들과 그때마다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며, 앞으로 다가올 나의 3 쿼터, 4 쿼터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듯이, 여러분의 1 쿼터, 2 쿼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특히, 이루고 싶은 꿈은 있으나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도전하는데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 여러 가지 인생의 선택지 앞에 망설이고 주저하는 분들, 자신의 무대를 세계에 펼쳐 보이고 싶은 분들에게 작은 희망이나 힌트라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첫번째 파트에서는, LG 에서 근무하다가 왜 갑자기 일본으로 MBA 유학을 떠나, 스미토모 상사에 입사했는지, 그 후로 일본의 종합상사맨으로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그리고 "미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종합상사란 어떤 회사인지에 대해 소개 할까 한다. 


두번째 파트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의 유년시절부터 청년기,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하기 까지, 어떤 경험을 했으며, 그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중심으로, 30년전의 소년이었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해 주고 싶은 어드바이스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 세번째 파트에서는, 6개월간의 미국 어학연수, 2번의 일본유학, 10년의 종합상사에서의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술 해 보고자 한다.

 

쓰고 보니, 너무 거창하게 이야기해서 솔직히 살짝 부담이 되긴 하지만, 이 정도 프레셔를 가해야 업무로 바빠서 글 쓰지 못했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것 같아 과감하게 여러분께 커밋 (commit) 해 본다.


항상 어제보다 조금은 성장한 내일을 꿈꾸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길...


2020년 9월

자카르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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