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사 최고 핵심부서로의 발령
미얀마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던, 2013년 여름 어느 날...
당시 나의 보스였던 "글로벌 업무부" 부장님이 날 부르셨다.
부장님이 회의실로 부하를 부르는 경우는 단 두 가지 경우뿐이다.
업무에 대한 꾸중을 하기 위해서거나, 부서 이동에 대한 내시 (内示, 일본어로는 "나이지"라고 함, 부서이동 발표 한 달여 전에 당사자에게만 미리 알려주는 사전 통보) 를 전달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꾸중들을 만한 사안이 없었던지라, 아~ 내시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을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속내는 따뜻하나, 반짝이는 대머리에 눈매가 엄청시리 날카로운 부장님은, 성격과 다르게 인상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유독 단 둘만 있는 회의실 분위기가 싸~ 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앉았다.
부장님 첫 한마디... 꾸중은 아닌가 보다...
~라고 바로 직감한 나는, 그다음 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미얀마 사업기반 정비를 위해 근 2년간 동분서주했던 나였기에, 새로 부임한 양곤 사무소장을 보좌할 주재원을 물색 중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자리는 십중팔구 나에게 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지래 짐작으로 이미 내 마음은 반쯤 양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미 태국 언저리까지 날아가고 있던 내 마음이 얼릉 동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인사이동 내시에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잘 못 들었나?
종합상사에 있어, "경영기획부"는 Very Special 한 부서이다.
경영기획부는 사장의 Brain과 같은 부서로 사장을 보좌하고, 회사의 모든 주요 정책을 입안하는 부서이다.
좀 과장해서 비유를 하자면, "대통령 비서실"과 "국회"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부서 같은 느낌이다.
보통 다른 부서는, "등번호(背番号)" 제도가 있어, 해외 주재를 나가더라도 일정 기한이 지나면, 같은 부서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어서 결국 한 부서에는 등번호가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지만, 경영기획부는 부원 전원이 각 영업부서나 회계, 재무, 인사부서 등에서 차출되어, 2~3년 후에 원래 부서로 돌아가는 특이한 부서이다. 회사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육성 로테이션"을 위한 인원들로만 구성된 "외인부대"인 샘이다.
보통 30대~40대 초반의 사원 20여 명으로 구성되는데, 회사의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사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부서이다 보니, 각 부서의 최고의 인재들만 차출되고, 경영기획부 출신은 일종의 "출세 코스" 혹은 "장래의 간부 육성코스"로 인식되어 있다. 실제로 많은 임원들이 과거 경영기획부를 거쳐간 경영기획부 OB (old boy) 출신이다.
아울러, 스미토모 상사에서 사장이 되는 코스는 몇 년 전까지 아래 세 가지 조합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1. 철강영업 출신 (당시에 스미토모 상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업부문)
2. 미국 스미토모 상사 사장 출신
3. 경영기획부장 혹은 그 위의 CCG (Corporate Coordination Group) 장 출신
이 공식이 2010년 초반까지 약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스미토모 상사의 본사 사장인 효도 사장은, 전력영업 출신, 인도네시아 스미토모 상사 사장 출신이라 지금까지의 역대 사장과는 다른 독특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경영기획부장이라는 공통분모는 가지고 있다.
내가 경영기획부에서 2년간 근무하는 동안, 효도 사장이 당시 경영기획부장으로 나의 직속상관이셨다.
아무튼, 이런 경영기획부에, 입사 3년 차의 경력사원, 그것도 외국인이 발탁되었다는 건, 당시 회사 내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다. 그만큼, 나 자신도 상당히 긴장되고, 심리적 부담감도 컸다.
부서로 이동하자마자, 이런 사치스러운 고민을 할 여유가 사라졌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각종 회의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저녁이 되면 개인 업무가 시작되니 야근은 그냥 디폴트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과였다.
특히, 매일 아침 회의는 이른바 "국회" 같이 누군가 새로운 경영정책 입안이나, 경영과제에 관한 나름의 설루션을 제안하면, 부서원 전원이 정말 기탄 1도 없는, 때로는 마음의 상처가 되는, 때로는 눈물이 쏙 빠지는, 거침없는 의견들을 끝도 없이 토해내는데, 제안자는 그 의견들을 수렴하여, 제안서를 몇 번이나 수정하고 다듬어서 다시 발표, 부서원들이 "오케이"하면, 최종 보스인 경영기획부장에게 보고 하게 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나는 느꼈다...
그런데, 이 경영기획부 만의 독특한 의사결정 방식에 이미 난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히토츠바시 MBA 시절의 수업방식이랑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로직의 허점을 파악하고, 대안 혹은 수정안으로서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학점을 따는 MBA 수업방식이 이럴 때 유용할 줄이야...
경영기획부 2년간 나는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얻었다.
최고경영자들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최고경영자들의 마인드 세트와 행동양식을 배울 수가 있었고, 회사의 각 사업에 대해, 회사의 어느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경영기획부에서의 내 주요 담당은 영업부문으로서는 식량사업이었고, 지역은 한국, 중국, 호주였다.
그 덕에, 지금은 많이 까먹었지만, 바나나, 당근, 돼지고기 등의 "먹는장사"의 생태계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고, 한국을 출장으로 가는 독특한 경험(?)도 했으며, 호주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15년 만에 다시 가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가장 크게 얻은 것은, 경영기획부 2년 동안, 사내에 엄청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
대부분 대졸 신입으로 입사해, 동기와 출신 대학을 중심으로 사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본인 사원에 비해, 경력사원에 외국인인 나로서는 사내의 네트워크 형성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영기획 부원이라는 독특한 신분(?) 덕에, 수많은 부서의 임원 및 사원들과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형성할 기회를 얻었다.
이것이 결국, 다시 영업맨으로 복귀할 수 계기도 열어주었다. 당시 자동차 영업본부 주도로 진행 중이던 인도네시아 프로젝트를 경영기획 부원의 입장에서 서포트하고 있었는데, 나를 잘 봐주신 영업본부장님이 자동차 영업본부로 불러주신 것이다.
2015년, 경영기획부에서 정확히 2년을 근무하고, 자동차 영업본부로 이동한 후, 반년만에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입사 3년 만에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경영기획부에 발탁이 되었는지, 그 정확한 과정과 배경, 회사의 판단기준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회사가 나를 "경력사원"이나 "외국인"이라는 편견 없이 다른 사원들과 똑같은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경영기획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도 "외국인 경력사원"으로서 차별하거나, 봐 주는 것 없이, 같은 부원으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2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해 준 것에 대해서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경영기획부로 다시 가라고 하면?... 흠...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