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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0. 2021

치매의 추억

어른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시간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 큰삼촌까지 도시로 떠나고 고향 마을에는 할머니와 작은삼촌만 남게 되었다.


할머니는 당신 혼자 지내는 것이 세상 편한 일이라 고집을 부려서 같은 마을 안에서도 작은삼촌과 따로 지냈다. 하지만 논밭 일로 바빴던 작은삼촌과 숙모가 아침저녁으로 언덕배기 집에 올라 식사 문안을 드리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고, 연로한 어머니와 따로 사는 이유가 대체 뭐냐는 동네 사람들의 잦은 수군거림도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자식 욕 그만 먹이라는 큰아버지의 성화에 할머니는 결국 고집을 꺾고 90년도에 작은삼촌 집으로 내려오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가끔 작은 숙모에게 휴가를 줄 겸, 봄가을에 한차례씩 부산에 있는 자식들 집을 번갈아 가며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남해로 돌아가곤 하셨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백 년을 거뜬히 버텼던 초가집은, 그러나 할머니가 작은삼촌 집으로 거처를 옮긴 그 이듬해 여름,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사람의 기운, 인기人氣가 사라져서 그렇다고 했다. 평생을 살아온 집이 하룻밤 새 폭싹 주저앉은 것을 본 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병원 진료와 요양을 위해 겸사겸사 부산의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온 1994년의 여름 즈음에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평소처럼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던 저녁이었다. 현관에 마중 섰던 할머니가 뜬금없이 아버지에게 그랬다.


아이고, 우리 오빠, 논에 물 대주고 오는갑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마침 놀러 왔던 내 친구 상훈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무이가 뜻밖에 농담을 하시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 오능교?


할머니가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때의 우리는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할머니의 치매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날을 시작으로 할머니의 증세는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졌다. 아버지를 몰라보았던 것은 그저 애교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딸도, 아들도, 며느리도, 그리고 그렇게 귀여워하셨던 손주까지도 하나하나 기억에서 지워갔다. 그리고 한동안 자각과 망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희망 고문을 하던 할머니는, 결국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그리고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껌껌한 망각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손주의 생년 월시까지 초롱처럼 기억하시던 그 총명한 할머니가 말이다.




큰아버지를 비롯한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핵심은, 할머니를 어떻게 할 것이냐, 더 정확하게는 누가 할머니를 모실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우리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요지는 이러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누가 모시느냐.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남들 같으면 당연히 장남이 모셔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둘째 며느리인 내가 모시겠다. 장남이 모시면 결국 서로가 다투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둘째인 내가 모시면, 형제들이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올 것이다. 어머니는 저렇게 발병했지만, 어머니 때문에 우리 형제가 멀어지는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모시겠다. 모시다가 정 힘들면 말할 테니 그때 도와달라.


평생 동안 아버지를 야단치고 혼내셨던, 그지없이 엄하기만 했던 큰아버지가 어머니의 그 말에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큰아버지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고모도, 삼촌도, 그리고 숙모들도 엄마 손을 잡고 그날 밤 대성통곡을 했다.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가 눈물에 섞였다. 그 옆에는 영문을 알 리 없는 할머니가 철부지 아이처럼 양배추 인형을 안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1972년 할머니의 회갑연


그러나 치매 간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신만 혼미할 뿐이었지, 체력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던 할머니는 걸핏하면 큰길로 달려 나갔다. 서면 갈라믄 어데로 갑니꺼? 고향 마을에도 서면이 있음을 알 리 없는 부산의 행인들은, 서면 가려면 길을 건너야 된다고 그저 친절하게 알려줄 뿐이었다. 호미를 들고 밭일을 서둘렀던 잰걸음으로 훠이훠이 대로를 가로지르는 할머니를, 다행히도 아버지의 동네 친구분들이 발견해서 집으로 모셔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하마터면, 하마터면 하는 아버지의 한숨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서둘러 시장에 다녀오느라 현관문을 잠시 닫아둔 사이, 2층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할머니를 경찰이 구조하는 날도 있었다. 닫힌 창문을 열려고 냄비를 집어던져 유리창이 깨지는, 그래서 할머니가 손을 다치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가 약속을 아예 단념하고 집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한결 나았다.


빨간 콩과 하얀 콩을 대야에 가득 담아 놓고, 어무이, 빨간 거랑 흰 거랑 골라서 담아 주이소. 그러면 할머니는 혼자 신이 나 그것을 두어 시간에 걸쳐 갈랐다. 보소, 아지매. 다 갈랐습미더. 그러면 어머니가 그 콩들을 다시 홱 섞어버리고는 다시 갈라 놓으이소. 다시 또 콩을 나누다가 할머니는 결국 지쳐서 잠들었다. 그러면 반나절의 시간이 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콩을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며 할머니께 몹쓸 짓을 했다고 눈물을 닦으신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외출해야 하는 날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할머니의 무단가출을 막기 위해 할머니가 머무는 방의 손잡이를 바꾸어 달았다. 밖에서 방문을 잠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날 아버지는 또 정말 많이 우셨다. 기껏 목수일 배워서 부모 가두는 재주로 쓴다며.


그러나 밖에서 방문을 잠근 날은 안에서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 할머니가 논에 물 들이친다고 벽지를 모두 뜯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석에 놓아둔 요강도 무용지물이었다. 사흘 걸러 한 번씩 그 방은 도배를 새로 해야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 두어야 했고,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할머니를 모시고 동네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와 잦은 눈물을 함께 씻어냈다.




어느 날부터 할머니가 전에 없이 벽에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어린 시절 한쪽 눈을 잃었던 할머니는, 나머지 한쪽 눈에만 의존하고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거실 벽을 더듬다가 갑자기 쿵 부딪히기도 하고, 나중엔 밥상의 숟가락을 찾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민하던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해운대 성모 안과를 찾았다. 백내장이었다. 엄마, 앞도 못 보는데 차라리 고마 콱 죽어 뿌소. 울다 지친 고모의 투정을 어머니가 겨우 진정시켰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어서 더 이상 닫힌 문에 얼굴을 부딪히는 일은 없어졌으나, 이젠 할머니의 체력이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루 종일 자리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지루한 날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를 즈음하여 꽤 늦은 밤에 욕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버지의 울음을 자주 듣게 되었다. 아이고, 어무이. 아이고, 어무이. 배변으로 엉망이 된 속옷이며 이불 따위를, 엄마 몰래 아버지가 씻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이,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다. 솔직히 할머니를 원망하는 마음도 조금씩 생겨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군대를 다녀왔음에도 그때의 나는 역시 철부지였다. 할머니 때문에 내 부모가 왜, 하는 원망이 이따금 들기도 했다.


할머니는 거동을 못하는 채로 변함없이 이부자리를 지켰지만, 아버지의 형제들은 다행히 어머니의 바람대로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이부異父라는, 조금은 껄끄러운 형제 사이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큰아버지는 전에 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했다. 고모와 큰어머니는 숫제 우리 집에 살다시피 했다. 고향의 작은삼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로 모두의 안부를 물어주셨다. 할머니는 기억의 끈을 놓아버렸지만, 아버지의 형제들은 그동안 놓고 있던 우애의 끈을 다시 잡았던 것이다.




불행하고 슬픈 징조가 시작된 그 날로부터 만 칠 년째 되는 2001년 가을날 아침, 할머니가 생生의 마지막 신호를 우리에게 보냈다.


아버지의 형제들이 역시 모두 모였다. 평소였다면 베갯잇을 여러 번 적셨을 몇 술의 미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할머니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마지막 한 술까지 깨끗이 받아 드셨다. 그리고 둘러앉은 자식들을 향해 마지막 말씀을 어렵사리 툭 내뱉으셨다. 작은 아가야, 고생했데이.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할머니는 헤어진 지 오십육 년 만에 할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웠다. 할머니의 장례를 마치던 날, 아버지는 이제 고아가 되었다고 또 서럽게 우셨다. 돌아보면 미련과 원망, 그리고 아쉬움만 남긴 어머니였을텐데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할머니의 죽음을 힘들어하셨다.


오십육 년 만에 나란히 누우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의 조화가 촌스럽지만 곱다.


할머니가 그렇게 떠나신 지 햇수로 이십 년이 지났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버지의 마음속에 여전히 그대로 계신 듯하다. 어쩌다 낯선 공항에 치매 부모를 버렸다는 불효자의 뉴스를 접할 때에도 아버지는, 오죽하면 자기 부모를 저런 데다 버리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간병 과정의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는 그 말의 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 염려하신다. 치매가 유전이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요즘 건강 검진에, 특히 치매 예방 진료를 절대로 빠뜨리지 않는다. 일전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가족력이라 하니, 유전이라 하니 걱정이다. 그러니 행여 내게 조금이라도 그런 증세나 기미가 보이면 두말 않고 요양원에 보내라. 우리 형제 누구도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정말 유전이며 가족력이라면 그것은 곧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과연 할머니의 치매가 무슨 추억이냐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할머니의 발병 이후 보여준 아버지의 형제들, 내 사촌들의 모습은 할머니의 간병 과정처럼 무조건 힘들고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간 보지 못했던 형제애의 발견이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으며, 할머니의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설령 그것이 가족력, 유전의 이름으로 다시 찾아온다 해도 슬기롭게 이겨낼 경험 또한 이미 우리에게 도착해 있음이다.


오늘을 이겨낼 힘을 주는 과거의 기억은, 그래서 추억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조금은 슬프고 힘들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저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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