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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1. 2021

시험의 추억

자, 가운데 가방 올리고


사범대로 진학해서 교사가 되겠다는 내 생각은 고3 담임 최재언 선생님의 반대로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은 1989년, 그 해 여름에 발표된 교직원 임용 고시 시행안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사범대나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자동으로 교사 발령이 났지만, 그 시행안 이후로는 모두가 예외 없이 임용 고시를 쳐야 하고 그 시험에 합격해야만 교사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법이 바뀐 것이었다.


나도 니를 서울대 보내면 뽀나스까지 나오고 참 좋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가 니를 왜 사범대 가지 말라 하는지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바라.


담임 선생님을 이길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모의고사 평균 점수보다 꽤 낮은 학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부모 고생시켜가며 퍽퍽한 서울 생활하지 말고 차라리 장학금 받으면서 집에서 편하게 다니라는 말씀에도 승복, 희망 대학까지 최종적으로 바꾸었고, 그러면서 고 3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2학기 수험 생활을 했다. 그때 고집을 더 부렸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대한민국 인구 중에서 가장 구성비가 높다는 71년 돼지띠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에서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시험을 며칠 앞두고 연이어 발표되는 학과별 예상 경쟁률과 학교별 예상 커트라인을 볼 때마다, 여유로웠던 나도 역시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야, 서울대 법대가 경쟁률 백대 일 되는 거 봤나? 경쟁률 신경 쓸 필요 없다.


함께 원서를 내고 돌아오는 길에 내 짝 유철이가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정작 그러는 본인도, 줄줄이 늘어선 학생들이 어느 과에 원서를 넣는지 꽤나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당시는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교에 직접 가서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도 그 대학교에 가서 치던 때였다.




시험 전날, 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감독관이 시험지를 나눠줬는데 내 것만 백지였다. 그리고 샤프심이 자꾸만 부러졌다. 답을 고치려 지우개를 갖다 댔더니 답지가 온통 시꺼멓게 변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울다가 눈을 떴다. 꿈이었다. 시험날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꿈은 생시와 반대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가방을 챙겼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걱정이 되셨던지 어머니가 따라나섰다.


마침 집 앞으로 지나는 빈 택시가 있었다.


어디 어디 시험장으로 가자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자, 사람 좋게 생긴 기사님이 여러 가지 덕담을 하며 내 긴장을 풀어주셨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내게 큰 엿 한 개를 주시면서, 이것을 수험장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로 먼저 가서, 소리가 따악 나도록 깨물라는 것이다. 소리가 크면 클수록 확실한 합격이란다. 그리고 자기 말대로 해서 시험에 실패한 학생이 없으니 걱정 말라시며, 합격 기원의 뜻으로 택시 요금도 안 받겠다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오히려 몇 천 원 더 주신 걸로 기억한다. 엿까지 받았는데, 혹시 전문가의 상술?


뉴스에서 볼 때는 저런 흑기사들이 은근히 부러웠습니다 (사진출처 : 경향신문)


역시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고사실을 확인하고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엿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받쳐 들고 잠시 기도를 한 다음, 있는 힘껏 깨물었다. 따아악! 텅 빈 화장실에 엿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1989년 12월 15일 금요일, 대입학력고사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 해 학력고사는 2교시 수학이 꽤나 힘들었다. 예년보다 엄청나게 어렵게 출제된 탓에, 수학으로 승부를 보려 했던 친구들이 손해를 많이 봤다. 반대로, 처음부터 수학을 접어두고 다른 과목에 집중했던 나 같은 경우는 덕을 봤다.


2교시가 끝났다. 점심을 먹을까 말까. 오후에 졸리면 안 될 텐데. 배고프지 않으니 그냥 참을까 하고 있는데 유철이가 입에 바람을 잔뜩 넣고 나를 찾아왔다.


제이야, 집에 가자. 나는 재수 할란다.


수학을 망쳤단다. 내가 알기로 유철이는 수학을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녀석을 억지로 잡았다. 중간에 집에 가는 것이나, 다 치고 집에 가는 것이나 시험 망치는 건 마찬가지다. 이왕에 온 거 끝까지 치고 가자. 나도 1, 2교시 그다지 잘 친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녀석을 달랬다.


선생님, 답이 안 보입니다 (사진출처 : 경향신문)


마지막 4교시 답지를 제출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했다. 수석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허풍이 들었다. OMR 神이 내 편이라면 말이다.


학교 정문 언저리에서 어머니가 두리번거리며 서 계셨다. 하루 종일 그 추운 곳에서 고사장을 향해 기도를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볼은 이미 발갛게 얼어 있었다. 다가가 어머니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머니도, 나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렇게 말했다. 고생했다, 내 아들.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


하루 종일 기도하셨을 어머니, 어머니들 (사진출처 : 경향신문)


얼마 뒤 면접이 진행되었고, 또 며칠 후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2교시 시험을 마치고 그냥 집에 가자던 유철이도, 나도 모두 합격했다. 갑작스러운 감기 몸살 때문에 나는 발표장에는 직접 가지 못했고, 대신 아버지가 담벼락에 붙은 수험번호와 이름을 확인하신 후 장전동 부산은행 앞까지 소리 지르며 달려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전해주셨다.




아들이 오늘 학교에서 시험을 치른다는 에 뜬금없이 그 날이 생각났다. 물론 대학 입학시험에 비할 바는 아닌, 그냥 테스트에 불과한 것이라지만 그래도 시험은 시험이다. 대학 가면 시험이 줄어들고, 그리고 사회 나가면 시험이 없을 거라더니 정작 현실은 매일매일 매 순간이 시험의 연속이다. 차라리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시험 있던 그 시절이 좋았다. 성적? 그건 그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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