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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0. 2021

군기軍氣의 추억

지구는 누가 지키나


1992년 2월 20일 목요일에 논산 훈련소로 입대하여 28 연대에서 6주 동안 신병 훈련을 받은 다음, 경북 경산에 있는 제2수송 교육단(이수교) 남천 부대에서 또 5주간의 운전병 후반기 교육, 그 후 자대 배치를 받아 1994년 5월 26일 목요일에 전역하기까지 정확하게 28개월 하고도 일주일을 만기 복무했지만, 군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은, 나의 근무지가 하필 경주였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복무했다고 하면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은, 경주에도 군대가 있어요?


모르는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묻겠지만, 본인과 가족이 근무를 하기 전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군부대들은, 본인과 가족이 근무하는 동안 또렷이 보였다가, 본인과 가족이 제대하는 순간,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마법을 가졌다고 말씀드린다면, 경주에 군대가 있냐는 질문에 답이 되려나?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경주라면 군 생활은 편했겠네요?


본인이 복무한 부대가 세상에서 제일 빡센 부대라는 것 또한 1천만 예비역들의 공통적인 주장이지만, 나는 감히 그 주장에 동참하기보다 남다른 겸손함으로 입을 닫은 채 조용히 숟가락 세팅을 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곤 한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군대라는 것은 몰디브에 있다 해도 막내 이등병은 죽어나는 것이며, 적과 마주한 최전방 초소라도 말년 병장의 내무반 생활은 지상낙원이 따로 없는 것이니, 사람의 아들 18방과 장군의 아들 6방, 심지어 군대 위병소도 가보지 않은 신의 아들, 즉, 면제 사병조차 본인의 군 생활이 제일 힘들었다고 하는 마당에, 단순히 어느 부대가 편하네, 힘드네 하는 것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논외로 하고 싶다.


후방에 위치했기에 상대적으로 호리낭창한 부대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독특한 규율과 기강이 있었던 탓에 오늘은 내가 근무했던 당나라 부대의 군기軍氣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것은 절대 비난을 위한 비교의 목적이 아님을 알아주시면 좋겠다. 물론 후방 부대라서 별의별 말도 안 되는 규칙이 있다며 저를 놀려 주시는 건, 당연히 대환영이다.




이등병은 혼자서 PX를 못 간다

이유는, 군것질을 하면 밥을 안 먹기 때문이란다. 글쎄다. 돌도 씹어먹을 때였는데.


이등병은 축구 시합에서 중앙선을 넘으면 안 된다

이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나는, 신병 대기 기간이 끝난 첫 토요일 시합에서, 광주 메시를 젖히고 속초 드로그바를 속여 중앙선을 넘은 다음, 이른바 손흥민 존에서 평택 사리체프를 향해 슛을 날렸다. 그날 밤 나는 문경 호날두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이등병은 내무반에서 앉아서 전화를 받으면 안 된다

전화 대기는 앉아서 하되, 전화가 오면 벌떡 일어나서 받아야 했다.


휴가 복귀 때 복귀 선물은 초코 파이 두 박스와 콜라 두 병으로 제한한다

내무반 현역병 인원이 스물네 명이었다. 딱 초코 파이 두 박스다. 휴가 복귀자의 주머니를 배려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딸깍거리며 캬 하던 위스키와 구수한 참치회는 어디서 난 걸까?


단기 하사에게 경례를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제일 많이 맞았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중사 진급을 하면 제대로 예우를 했다.


방위병에게 말을 높여서는 안 된다

경주 최대 폭력 조직 시내파의 행동대장 물찬이가 92년 6월 즈음에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얼굴을 몰라본 방위 계원이 물찬이에게 기합을 줬다. 다음날 그 계원은, 이하 생략.


상병 아래로는 식사 때 민간인 반찬을 먹을 수 없다

PX에서 구매한 깻잎이나 참치 통조림 따위는 금지되었다. 물론 성은을 베풀어 나눠주시는 것은 감사히 먹어도 되었다.


병장 달면 내무반에서 일과 시간에도 누울 수 있다

상병 때까지 그게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누워보니 별거 없었지만.


일병 밑으로는 앉아서 전투화 끈을 매면 안 된다

긴장하라고 만든 규정이었던 것 같은데, 허리를 굽혀 양쪽을 매고 일어서면, 머리가 핑 돌았다.


일병 달 때까지 면회와 외박은 불가능하다

이등병 때는 신병 위로 휴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병 밑으로는 내무반 안에서 군화를 닦을 수 없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상병 달기 전까지 혼자서 공중전화를 쓸 수 없다

운전병이었던 내겐 무관한 규정이었다. 1호차는 언제나 위병소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롱.


모포 세탁은 상병만 할 수 있다

상병 죽으라고 만든 규정인 것 같다.


휴가병 군복 다리는 것은 아버지 군번(입대 월 기준 1년 차가 나는 선임 사병)이 전담한다. 아버지 군번이 없을 땐 상병 말호봉이 한다

내 아버지 군번, 대구 사람 채영규 병장이 복무 단축으로 조기 전역을 해버리자, 나는 아버지가 없어졌다. 그래서 영천 사람 김현우 상병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 군복 줄이 두 개로 잡혔다. 참고로 김 상병은 취사반이었다.


선임병과 같이 휴가를 나가면 후임병은 절대 돈을 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함께 휴가 나갈 바에는 차라리 안 간다고 떼를 썼던 박상민 병장, (형, 반성해!)


비디오는 병장이 선택한다

부대가 경주 동천동 보건소 옆에 있었고 그 옆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신新프로 나왔다고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신호를 보내면, 병장 중 하나가 위병소에서 비디오 재킷을 보고 골라왔다. 그런데 우리는 맨날 이상한 자연 다큐멘터리만 봐야 했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백 아무개 병장.


전역 날짜 기록표 (형광색은 휴가기간) 어쩌다 이걸 또 선임한테 들켜서...


명색이 군 생활이었으니 그 시절 사진을 올리려고 찾아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사진이라는 게 죄다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가 배경이니 이건 뭐, 군 생활이라기보다 군복 입고 떠난 수학여행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그림뿐이다. 게다가 여러 예비역들로부터 쏟아질 비난을 이겨낼 만큼 내가 뻔뻔한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규정에 크고 작은 제약을 받은 군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되니 제대할 날이 찾아왔다. 편했던 복무였으나 그래도 주워들은 게 있어서 제대하고 나면 경주를 향해 오줌도 안 눌 거라 공언했지만, 전역하던 94년 그 해 가을과 이듬해 봄까지 두어 번, 초코파이와 음료수, 순대, 떡 따위를 차에 가득 싣고 부대에 놀러 가곤 했다.


얼굴이 낯선 신병과 인사를 하는데 그 녀석이 대뜸 한다는 말,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무슨 말씀’을 심지어 '많이' 들었는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다른 선임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만큼은, 임 병장만큼은 그 지랄 맞던 규율과는 상관없이 후임병들에게 그지없이 자애롭고 한없이 따스한, 언제나 큰형 같았던 선임병으로만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충성, 쿨럭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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