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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0. 2021

이름의 추억

꽃이라 불러주기 전에


1981년, 열한 살의 나는 내 이름을 바꾸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멋진 이름은 아니었다. 멋진 이름이 되려면 적어도 태권 브이의 , 짱가의 , 독수리 오 형제의 처럼 굳이 혜성이나 태풍까지는 아니어도, 훈, 혁, 현, 민, 준, 규 하다못해 , 그중 하나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준혁, 강민규 하고 출석을 부르실 때마다 아, 진짜 멋지다. 저게 내 이름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나 혼자 속으로 부러워하곤 했다.


쇠돌아, 넌 빠져도 된다 (출처 : 네이버이미지)


멋진 이름에 대한 나의 동경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반에서 제일 예뻤던 희정이가 이준혁, 니는 집도 부자고 이름도 참 멋지데이 하는 것을 청소 시간에 얼핏 듣게 되었다. 그 순간, 그때까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던 내 이름이, 손에 있는 밀대 걸레처럼 갑자기! 엄청나게!! 촌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준혁이와 친한 부잣집 아이들은 모두 현수, 창민, 준규, 지훈 등이었고, 그에 비해 복태, 재만, 병구, 춘기 들은 이름만 들어도 내 편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멋진 이름, 멋진 이름은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는 모르겠지만 이름만큼은 어떻게든 저 쪽 줄에 서야겠다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이름을 바꿔달라는 간청을 들은 아버지는 대답 대신 허허 웃기만 하셨고, 엄마는 부엌에서부터 빗자루를 들고 달려오셨다. 여섯 살 터울 누나 뒤로 도망친 나는, 멋진 이름으로 미리 바꿔줬으면 이렇게 엄마한테 맞고 울 일도 없잖냐는, 인터스텔라 궤변을 빼액 던졌다가 내 편인 줄 알았던 누나에게까지 덤으로 한 대 더 맞아야 했다.



어느 날 담임 김명숙 선생님은, 이제는 4학년이 되었으니 전과를 베껴서 숙제를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특히 단어의 뜻을 적어오는 국어 낱말풀이 숙제는 답이 똑같으면 모두 빵점 처리하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 말에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전과를 살 형편이 아니었던 나는, 2학년 때부터 누나의 감시 아래 국어사전을 뒤져가며 낱말풀이 숙제를 해왔었다. 선생님은 그리고 낱말 빨리 찾기 대회를 할 테니 내일 다들 사전을 가져오라 하셨다. 2년간 단련했으니 일등은 이미 내 거라는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필이면 그 날따라 누나가 시험 때문에 국어사전을 학교에 두고 왔다는 것이었다. 누나는 고심 끝에 집에 있던 다른 사전을 챙겨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른 사전이라는 것이...


민중서관 국어대사전 (출처:네이버 이미지)


아무리 봐도 가방에 들어갈 크기가 아니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은 다음, 결국 보따리에 싸서 가져가기로 했다. 쇼핑 가방이나 비닐봉지가 드물었던 때였다.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는 내 모습은 개화기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에 다름없었다.


끙끙대며 들고 온 보따리를 책상 위에 터억 내려놓자 명수가 제일 먼저 냄새를 맡았다.


니 떡 해왔나?


보따리 속에서 떡이 아닌 사전이 툭 튀어나오자 명수가 이번에는 또 와아 소리를 질렀다. 애들이 모여들었다.


사전이 머 이리 크노? 와, 니 사전이 우리 반에서 왕이다, 왕. 히히.


아이들이 주위를 둘러싼 가운데 사전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명수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와, 여기 내 이름 있다. 사전이 윽수로 크니까 별 게 다 있네, 직이네. 명, 수, 명사…기, 능이나…기술 따, 위에서소, 질과 솜씨가, 뛰어, 난사람. 와, 직이네, 내 이름이 그런 뜻이란다. 보자, 다음에는. 대관아, 니 이름 찾아 주께. 또 몇 장을 뒤적이더니 대, 관…크고넓, 게전체를… 내, 다봄. 또는, 그, 런관찰. 알겠나, 대관아. 내 잘 찾제? 직이제?


명수는 꽤나 신이 났다. 우리 분단 애들의 이름을 하나씩 찾아서 큰 소리로 읽어주던 명수가 갑자기 말을 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낮은 소리로 제이야, 여기 부반장 이름이 있는데. 근데 와? 명수가 대답 대신 때 낀 손톱으로 사전의 한 줄을 가르쳤다.


아뿔싸


우리 반 여학생 부반장의 이름은 박성교였다.


눈으로 글자를 쫓아가던 아이들이 금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머라꼬? 여자 부반장 이름이 빠XX란 뜻이라고? 진짜가? 부반장이 X구리라고? 전혀 알지 못했던, 그래서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낯선 단어가 그지없이 익숙한 말뜻을 달고 열한 살 우리들 앞에 난데없이 훌러덩 나타난 것이었다.


지식의 전파는 빨랐다. 좁아터진 교실에 빽빽한 아이들 사이로 낯선 단어의 익숙한 뜻은 날개를 달았다. 책상에 엎드린 부반장이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어느 교실에나 있는 맨 앞줄 촉새가 나섰다.


선생님, 부반장 우는데예. 그 말에 선생님이 놀랐다. 아니, 왜 우니? 무슨 일이야?

촉새가 또 입을 털었다. 최명수가 사전에서 부반장 이름 찾아 갖꼬 놀맀는데예.

아닌데예. 놀리지는 않았는데예. 명수가 발끈했다.


잠시 후, 최초 발견자이신 발끈 최명수 선생과 말뜻 전파자 서넛, 그리고 단초를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나는 복도에 꿇어앉아야 했다. 억울했다. 사전을 가지고 온 것 말고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사전을 편찬한 이희승 박사님도, 그리고 민중서관 사장님도 내 옆에 꿇어앉아야 마땅했다. 나는 정말 억울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날은 그렇게 오랜 시간의 벌로 힘겹게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날 아침,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가는 어떤 아줌마를 보았다. 알고 보니 부반장 엄마라고 했다. 우리는 또 한 번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나 싶어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대신, 그 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말에는 긴 소리와 짧은소리가 있다는 것을 시작으로 꽤 많은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다. 너희들이 성교라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성교와 저 성교는 다르다. 이 성교는 성교, 이렇게 소리 내고 저 성교는 서엉교 이렇게 소리 낸다. 그러니 부반장의 이름은 서엉교가 아니라 성교다.


그러나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머릿속에서 짧은 성교는 사라지고 사전 속의 긴 서엉교만이 더욱더 또렷하게 부각되었다.


결국 우리는, 부반장을 부를 때 절대로 이름으로만 부르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사실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성춘향을 그냥 춘향이로, 즉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면 당장에 얼레리 꼴레리의 놀림을 받던 때였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른다는 것은, 둘이 이미 얼레리 꼴레리 사이라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라고 그때의 우리는 굳게 믿었다. 이 합의는 여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부반장은 심지어 자리에서 물러난 2학기에도 변함없이 부반장이라는 호칭으로 통했다. 심지어 선생님조차 출석을 부를 때, 김 똥개, 최 말똥, 부반장 하는 식으로 성교를 챙겨 주셨다. 간혹 박 서엉교라고 불러서 스스로 매를 버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전을 학교에 가져가는 일은 그 후로는 두 번 다시없었다.


참으로 특이한 이름들입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편집 : 진우)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고 군대를 거쳐 사회에 나오는 동안, 나는 참으로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중학교 친구는 방구봉이었다, 이름에 기인한 그의 별명은 방구쟁이였다. 고교 동창 석봉석의 별명은 역기였다. 돌(石)과 돌(石) 사이에 봉이 있다는 거였다. 대학교 학과 동기는 하익오였다. 당연히 별명은 통곡이었다. 군대 군수과장은 한성갈이었다. 별명은 상상하는 대로다.


심지어 지금 나의 일을 도와주는 여직원은 노인정 양이다. 자기를 영어 이름 로인 Roin으로 불러달라길래 인정 사정없이 그렇게 불러? 하며 농담을 걸었다가 회사를 그만 두네 마네 소동을 피운 적이 있다. 인정 양은 그래서 지금 심각하게 개명을 고민 중이다.




열한 살 때의 개명 투정은 그렇게 무시하시더니, 어머니는 내가 마흔 중반을 넘은 이후에 뒤늦게 내게 개명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이번에는 내가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터부 taboo로부터 내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고 굳게 믿으셨던 어머니는, 아내와 누나와 여동생을 동원하며 끝내 나의 개명을 설득하셨다. 물론 행정 서류를 모두 변경하는 법적(法的) 개명은 아니었고, 일상생활에서 새롭게 불리길 바라는 생활 개명이었다.


거의 쓰지 않는 이름입니다. 가족들만 이렇게 부릅니다.


새 이름을 받아가던 날, 아내와 아들은 나를 놀렸다. 이제 로봇만 사면 된다고. 멋진 이름에 걸맞은 로봇 하나 사자고. 창피했다.


하지만 새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솔직히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명함에 찍힌 이름 때문에 관공서에서 두세 번 설명을 되풀이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웠다. 그래서 잘 쓰지도 않는 이름 하나가 거추장스럽게 생긴 꼴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이름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


이름이 좋다고, 또는 이름이 나쁘다고 자신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게다. 그리고 달라진 미래가 바뀐 이름의 덕은 아닐 것이다. 나의 추억 속에 자리한 많은 친구들은, 그 이름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다들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개똥이든 말똥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전부터 본인의 향과 색을 가진 개똥 꽃, 말똥 꽃이었던 거다.




오늘도 역시 처음 만나는 분과 명함을 주고받는데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한가해진 오후에 추억과 기억의 양손을 잡고 그때 교실 문을 슬며시 연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있는 한 여학생을 조심스레 불러본다.


잘 지내지, 부반장. 내 친구 성교야!


그녀가 개명을 했을지 원래 이름 그대로일지, 사실은 나도 그게 퍽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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