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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n 10. 2021

꾀병이 필요하다

관종關種의 난亂


여섯 살 많은 누나, 그리고 세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자란 나는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이 나보다 누나와 여동생에게 더 많이 신경을 쓴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누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여동생은 어렸으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까지 넓게 헤아릴 만큼 철이 들지는 않은, 고작 열 살짜리 어린 애에 불과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욱 컸던 이유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짧았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의 말을 빌자면,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되니까' 아침상을 치우자마자 두 분은 모두 생업 전선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얼굴을 대하기가 어려웠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당연히 저녁 식사부터 잠들 때까지의 시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조차 부모님은 누나와 동생을 더욱 챙기셨다(고 느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멀어진 부모님의 관심을 내게로 다시 가져오려면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꾀병 [명사] [의학]

동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보상을 받기 위하여 병이 없는데도 병이 있는 것으로 가장하는 짓

출처 : 국어대사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꾀병은 감기나 배탈, 아니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조건 아픔’ 따위였다. 그러나 감기는 '체온 강제 상승'이라는 어려운 숙제가 필수였다. 그리고 무조건 아픈 것 또한 신체의 특정 부위를 미리 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꽤나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의사 선생님 앞에 끌려가 공식적으로 꾀병임을 인증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게 있어서 가장 만만한 선택은 역시, 배탈이었다.


동생과 잘 놀다가 엄마가 올 시간이 되었다 싶으면, 일단 방구석에 웅크려 눕는다. 그리고 동생에게 미리 다짐을 해 둔다. “엄마가 물어보면, 오빠야가 아까부터 아팠다고 해라. 안 그러면 내일, 같이 안 놀아준다, 알겠제?” 겁을 먹은 동생은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준비 끝. 엄마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면 고맙게도 동생이 먼저 말을 해 준다. “엄마, 오빠야가 아까부터 아프다.” 아이고, 기특한 것. 그 말에 걱정이 된 엄마는, 벽을 향해 누운 내 옆에 서둘러 앉으신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노?”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좀 전까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던 배가 갑자기 진짜로 아픈 것 같고 심지어 눈물마저 와락 나올 것 같다. 용을 써가며 엄마 쪽으로 애써 몸을 돌린 다음,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으로, “잘 모르겠다, 엄마. 그냥 아프다.”라고 억지로 몇 마디 짜낸다. 그러면 엄마는 내 옷 속으로 손을 쑥 넣어 배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일하다가 돌아와서, 방금 찬물에 씻기까지 했던 엄마의 손은, 그러나 세상에 둘도 없다 싶을 만큼 따뜻하다. 그제야 엄마의 관심을 내게로 가져왔다 싶어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짓는다.


단, 병명이 배탈이다 보니 저녁 한 끼 굶는 것은 당연히 각오해야 된다. 상관없다. 엄마의 관심을 가져오는 데 그깟 밥 한 끼쯤이야. “죽이라도 써 주구려.” 늦게 돌아오신 아버지가 이렇게 한마디라도 더 거들어준다면 그날의 내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이상하리만치 배앓이를 자주 하는 아이였다.




결혼 초 아내의 주된 관심은 당연히 나였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나고 아내가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아내의 관심사로부터 조금씩 밀려나는 것 같았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이해하는 척할 때도 있지만, 아내가 최소한의 관심(이라고 쓰고, 내가 바라는 수준의 관심이라고 해석한다)조차 내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때로는 꽤나 섭섭하기도 하다.


아들이 제 스스로 앞가림을 할 만큼 자랐으니 이젠 아내가 내게 관심을 주는 듯 했다. 그런데 뜻밖에 예정에도 없던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말로는 처제의 친구 대신 일주일만 맡아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내의 실제 속내는 그게 아닌 것 같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통화를 하던 아내가 이번 주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들은 자식이니까 양보하고 이해할 수 있다 쳐도, 개는 아니다.


결국 한동안 감춰 두었던 수법을 다시 써 볼까 고민한다.


우선 배가 아프다고 해 볼 작정이다. 아내의 반응이 궁금하다. 물론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다. 내일부터는 어떻게든 내 아내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이른바 관종關種의 난亂이 본격적으로 시작다. 다들 기대하시라, 바야흐로 개봉박두!



Image By Hwang Yeo-Sa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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