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퇴근길에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오셨다. 큰집 개, 복순이가 한 달 전에 새끼 다섯을 낳았는데 그중 가장 어린 녀석을 얻어온 것이라고 했다. 개를 갖고 싶다고 내가 노래를 부른다 하니 큰아버지가 흔쾌히 나눠 주셨단다. 뭐 딱히 노래까지 부른 적은 없지만, 나도 이제 앞장세워 뛰어다닐 개가 생겼으니 더 이상 병철이에게 기죽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곤히 잠든 하얀 백설기를 조심스레 안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목수 정신을 발휘해서 슥삭슥삭 판자를 자르고 뚝딱뚝딱 못을 박아 금세 개집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일론 끈을 개의 목에 둘러 매듭을 지은 다음, 한쪽 끝은 개집에 박은 대못에다 튼튼하게 묶었다. 엄마는 개집 안에 낡은 수건 두어 장을 잘 펼쳐서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고물 장수가 오면 엿을 바꿔먹을 예정이었던 낡은 냄비는 밥그릇이 되어 개집 앞에 떠억 하니 놓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이름, 개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반려견은 고사하고 애완견이란 용어조차 생소한 시절이었다. 개 이름은 뻔했다. 해피나 메리, 아니면 쫑이거나 독구.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되었다. 작명권作名權을 가진 나는 주저 없이 해피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라면의 이름이 ‘해피’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해피는 그날부터 우리 식구가 되었다.
한동안은 잘 크는가 싶었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리 집으로 온 한 달이 지날 무렵부터 해피는 밤낮없이 짖었다. 그리고 짖지 않을 때에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도둑 들어올 일이 없어져서 좋다고 웃으셨지만 엄마는 걱정이 앞섰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떨어져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해피가 불쌍했다. 그래서 내가 먹던 과자도 남겨주고, 학교를 마치고는 곧장 달려와서 해피 옆에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해피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낮없이 짖어댔고, 끙끙거렸고, 그리고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반장 집을 지날 즈음이면 벌써부터 해피의 짖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하는데 그날따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낮잠이라도 자는 건가? 조심스레 뒷문을 열었다. 여전히 마당은 조용하다. 슬쩍 고개를 넣어 살피는데 무엇인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린다. 나일론 줄이다. 목을 묶었던 나일론 줄만 덩그러니 남은 채 해피는 온데간데없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퍼뜩 스쳤다.
엄마는 오후 내도록 이웃집마다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우리 개, 우리 해피 못 봤냐고. 반장 아줌마는 오후 나절에 오토바이를 탄 낯선 이가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개 도둑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빌어먹을 놈이라는 욕도 하셨다. 나는 얼른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자고 아버지를 졸랐다. 그러자 누나가 말렸다. 누나는 해피가 이미 죽었을 거라고 했다. 어른들은 때가 되면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을 그때 누나로부터 처음 들었다. 그 말에 애써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해피라는 영어의 뜻조차 제대로 몰랐던 때, 우리 집에 몇달간 머물렀던 해피는 그렇게 전혀 해피하지 않은 이별을 했다. 그것은 꽤나 오랫동안 내게는 상처로 남아, 인위적인 헤어짐에 대해 강박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들은 환장한다는 보신탕을 내가 눈길도 주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웬만한 결정에는 아내의 뜻을 쉽게 따르는 내가 아직까지도 의견이 달라 대립하는 문제는, 바로 개를 키우는 것이다. 결혼 전에 개를 키웠던 아내는, 아들이 크고 나니 그때를 그리워한다. 이미 오래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과거의 개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방 천지에 가득한 반려견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수시로 보여주면서 은근슬쩍 개를 키우자는 말을 꺼낸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큼은 철저히 반대한다.
어린 시절 해피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반려견은 사람보다 먼저 죽을 것이 뻔한데, 예정된 아픈 이별을 왜 굳이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냐는 것이 내 반대의 주된 이유다. 언성 높일 것이 세상에 없는 우리 부부도 그 이슈로는 몇 번이나 얼굴을 붉히기 직전까지 갔다. 아내도 결국 내 뜻을 이해했는지 한동안은 개를 키우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아내가 최근 전략을 바꾼 것 같다.
몇 주 전부터, 이거 귀엽죠? 하면서 몇 장의 사진을 반복해서 내게 보여주었다. 강아지 사진이다. “응, 귀엽긴 하네.” 그 말이 결정적인 돌파구라고 생각했던지 최근 들어 언급의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러다가 엊저녁엔 뜬금없이 그런다.
“내일 우리 집에 루이가 올 거예요.” “루이? 그게 누군데?” “얼마 전에 보여준 강아지 사진, 기억나죠? 그 애 이름이 루이예요.” “그 개가 왜 우리 집에?”
알고 보니 루이는 처제의 친구가 키우는 강아지란다. 이번에 일주일 정도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아내의 사주를 받았음이 틀림없는 처제가 그 기간 동안 루이를 대신 봐주기로 했단다. 아니, 처제가 봐주는 거라면 장모님 집으로 가야지 왜 우리 집인가요, 황여사님?
'일주일 동안 봐주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그걸 계기로 우리도 키우자거나,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아내에게 확실한 다짐을 몇 번 씩이나 받은 뒤에, 나는 루이의 일주일 체류에 결국 동의했다.
오늘 저녁 여덟 시 즈음에 루이가 온다. 어떤 경우든간에 절대로 정情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부터 마음을 다잡고 있다. 개는 어디까지나 개일뿐이다. 열 번 되풀이. 일주일이다, 딱 일주일. 루이의 잠자리를 어디로 할 것인지 아내는 아까부터 정신없이 바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십년 전 해피를 다시 소환했다.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결말은 생각지도 않는다. 살아있다면 마흔 살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으니, 이미 떠났을 견생犬生이라면, 해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주어진 운명대로 그저 해피하게 살다가 해피하게 떠났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