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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n 13. 2021

자네에게 내 딸을 주고 싶네 (1)

영화와 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신입 사원의 하루는 야단으로 시작해서 꾸지람으로 끝났다.


욕설은 기본이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1997년이었다. 어떻게든 지적을 당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실수는 오히려 늘어만 갔다. 결국엔, “저런 게 우리 회사에 어떻게 들어왔지?”하는 소리를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람 좋았던 부장님이 이따금 나를 불러, 신입 때는 다 그런 거라며 다독거려 주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두목보다는 행동대장이 더 무서운 법이어서 직속 선임 양대리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주눅부터 들었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오죽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조차 겁이 나서 못할 지경이었다.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보관해야 할 통관通關 서류를 그만 협력업체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이번 수출 건件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전혀 엉뚱한 회사에다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근 직후에 엉뚱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양대리가 분노의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팔색희, 구색희 다음의 색희와 몇 칸 건너뛴 열여덟 색희가 쉴 틈 없이 내게로 와르르 쏟아졌다. 싸다구를 맞는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빨리 튀어 가서 서류 다시 받아오고, 아냐, 퀵으로 보내. 그리고 넌 회사로 오지 말고 그냥 집으로 꺼져!” 안쓰럽게 나를 쳐다보는 여직원들의 시선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끈적끈적한 진땀이, 신기하게도 눈에서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찾아 다니며 어렵사리 수습을 마쳤을 때는 낮 12시를 이미 지난 시각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협력업체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다리가 풀린 것이었다. 이제 겨우 4월 중순일 뿐인데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내겐 한여름의 그것보다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서류는 먼저 보냈으니 이제 회사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즈음이면 아마도 점심시간이 끝났을 것이다. 만일 이 곳 종로에서 밥을 먹고 출발하면? 역시 조금 늦을 것 같다. 그 꼴을 두고 양대리가 무슨 말을 퍼부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이었다. 이십팔색 크레파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침 작은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빵과 우유 한 개씩을 대충 골랐다. 간단하게 허기만 면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앉아야 할 것 같아서 봉지를 든 채 탑골 공원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꽃밭 가장자리에 겨우 걸터앉아 빵을 막 꺼내려는데, 하필 맞은편에 쪼그려 앉은 어떤 영감님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철 지난 두터운 점퍼, 빗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 유난히 푸석해 보이는 얼굴, 앙상한 광대뼈, 구부정한 허리. 대놓고 노숙자는 아니었지만 행색으로 미루어보아 걸인임에 틀림없었다. 영감님은 내가 들고 있는 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배가 고프신가 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영감님께 다가갔다. 그리고 우유 팩을 열어서 빵과 함께 영감님께 드렸다. “어르신, 시장해서 그러시죠? 이것 드세요.” 영감님은 말없이 그것을 받았다. 나는 다시 사 먹으면 될 일이었다. 바지의 흙을 털며 편의점으로 갔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만큼 가게 안에서 대충 먹고 서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선 채로 빵을 입에다 억지로 욱여넣고 우유를 마시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내 등을 툭 쳤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우유를 뿜을 뻔했다. 순간 짜증이 나서, 뭐야, 하며 돌아보니 뜻밖에도 아까 그 영감님이 내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 아직도 배가 고프신가? 하기야 겨우 빵 한 개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서 내가 물었다. 영감님, 빵 더 드실래요? 그러자 영감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나랑 같이 좀 가세.”


깜짝 놀랐다. 영감님의 초라한 행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내 멱살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편의점에서 나오자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옆에는 미끈하게 잘빠진 검은색 승용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남자가 차의 뒷문을 열었다. 영감님은 그의 도움을 받아 자연스럽게 차에 올랐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네도 타지.” 영감님이 뒷자리에 앉은 채 내게 그랬다. 아, 네네. 나는 잰걸음으로 차의 뒤를 돌아 영감님 옆 자리에 앉았다. 태어나서 벤츠를 처음 타는 것이었다. “가자.” 영감님의 말 한마디에 미끄러지듯 스르륵 차가 출발했다.


출발한 지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벤츠는 큰길을 벗어났다. 고급 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몇 번 꺾는가 싶더니 금세 훤하게 뚫린 너른 길이 나왔다. 그리고 길가 양쪽으로는 하늘까지 솟은 담장들이 보였다. 높이가 얼추 십 미터는 넘을 것 같았다. 마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그런 고급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삼청동이나 평창동 어디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신기하다고 해서 그저 감탄사를 내뱉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영감님을 슬쩍 보았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 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왜 이 차에 올라탔는지 이제야 슬슬 걱정과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감님이 갑자기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자네, 혹시 결혼했는가?”

“겨, 결혼요? 아직입니다만.”


그 말에 영감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을 보는 순간, 희한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일련의 생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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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Engin Akyurt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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