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어디 즈음에 이르자 차가 속력을 줄였다. 저만치 버티고 서서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다시 철문이 닫히고 나서야 차는 완전히 멈추었다. 운전하던 남자가 서둘러 내려선 곧 뒷문을 열었다. 영감님을 따라 나도 후다닥 내렸다.
세상에나, 그렇게 넓고 멋지게 꾸며진 마당이, 높디높은 담장 너머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영감님이 느린 걸음으로 꽃길 사이를 걸었다. 나도 그 뒤를 조용히 걸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으리으리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한옥韓屋이 기세 등등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잠시만 앉아 있게.”
거실에 나를 앉혀두고 영감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도우미 아주머니(였던 것 같다)가 갖다 주는 찻잔을 받았다. 나를 힐끔거리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읽기 어려운 한자가 빽빽한 병풍, 산수화가 그려진 액자, 매끈한 도자기, 펼쳐진 부채, 옛날 자개장, 그리고 장군도將軍刀 등 화려하게 꾸며진 거실은, 한눈에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듯한 진귀한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감님은 일단 엄청난 부자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영감님은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겼고, 얇은 뿔테 안경까지 콧등에 올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택이 눈부신 비단 한복 차림이었다. 영감님이 나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실 나는 사윗감을 찾고 있었네.
네? 사윗감요? 매일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지. 그러셨군요. 관상은 거짓말을 않거든. 며칠 동안은 감기 몸살로 나가질 못했네. 그러다 오늘 자네를 본 것이야. 요즘에 자네같이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해. 별말씀을요. 자네, 결혼 안 했다고 했지? 네. 그러면 내 딸을 자네에게 주겠네, 내 사위가 되어주게. 네에? 사위라구요? 나는 평생 돈을 모으기만 했지, 쓸 줄은 몰랐어. 마누라 죽고 나서 내게 남은 거라고는 외동딸 하나뿐일세. 장인 어, 아니 영감님. 저는 아직 준비가. 아닐세, 이 늙은이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게. 자네같이 착한 젊은이라면 내 재산을 소중하게 관리해 줄 거야. 내, 부탁함세.
영감님이 도우미 아주머니를 시켜 누군가를 불러오라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곧 영감님 뒤로 어떤 아가씨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영감님이 그녀에게 말했다. 너, 이분한테 시집가도록 해라. 보기 드문 착하고 멋진 청년이야. 이 청년이라면 너를 잘 지켜줄 거다. 그 말을 듣더니 영감님의 딸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그날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아니, 연애랄 것이 없었다. 바로 결혼 준비였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영감님은 우리에게 결혼 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나눠 주셨다. 세금을 제하고도 얼추 백억 원이 조금 더 되는 돈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두 달 앞둔 시점에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영감님이, 아니 장인어른이 너무도 좋아하셨다.
아내는 내게 회사를 그만둘 것을 권했다. 하긴 그 말이 옳았다. 더 이상 상황을 숨긴 채 회사에 다닐 이유가 없었다. 결혼식을 올리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었다. 퇴사를 결정한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양대리를 따로 불렀다. 무슨 일이냐며 대뜸 욕부터 하려는 양대리에게 사표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양대리의 눈이 똥그래졌다.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양대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왔다. 차 옆에서 기다리던 장인어른의 기사가 롤스로이스의 뒷문을 열었다. 나는 차에 오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양대리가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양대리님, 고생하세요. 그리고 힘들면 한 번 찾아오세요.
“차 안 마시고 뭐해? 자네도 기분이 좋은가 보네. 계속 웃고 있는 걸 보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그제야 뜨거움을 느꼈다. 하마터면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영감님이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줌마, 재희 좀 오라고 해.”
아, 재희란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딸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인이 아니어도 좋다. 잠시 후 내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다가왔다. 재희 아가씨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걸음에 맞춰 마루가 울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덩치가 좋은 편인가 보다. 상관없다. 아무렴 어때? 백억인데.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장착한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재희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지금 막 천하장사에 등극한 강호동이 떡하니 서 있었다.
“아빠, 왜 불렀어? 이 사람 누구야? 나 수금하러 가야 되는데.”
“응, 인사해라. 요즘 보기 드문 착한 젊은이라서 차 한 잔 대접하려고 잠시 데리고 왔다. 임군, 자네도 인사하게, 내 외동아들일세.”
외동아들이라구요? 그런데 왜 동물 아들을, 아, 아닙니다. 재희아가씨는 나보다 두 뼘은 족히 컸고, 덩치는 갑절이라 목이 어깨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그가 내민 손을 나도 모르게 엉겁결에 잡았다. 두툼했다. 내 손이 아기 손처럼 재희의 손안에 포옥 감싸졌다.
영감님은 그날 있었던 일을 외동아들 재희에게 말했다. 빵과 우유가 주된 것이었다. 영감님이 말하는 동안, 재희는 간간이 한숨만 쉴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꽤나 각색이 된 이야기 끝에 영감님이 나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임군도 나중에 돈 쓸 일 있으면 주저 말고 찾아와. 우리 아들이 잘해 줄 거야.”
“에이, 아빠. 이런 사람들은 우리 돈 못 써요. 기껏 푼돈일 텐데. 그럼 저, 먼저 갑니다. 아빠, 저 동대문 갔다가 불광동 다녀올게요. 오늘 미수 많아서 바빠요. 그럼, 놀다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서던 재희가 내 손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포근히 감싸주었다. 네, 나중에 돈 쓸 일 있으면 꼭 찾아오겠습니다, 재희 씨. 근데 문신은 어디에서 하셨어요? 호랑이가 아주 그냥 죽여주네요.
영감님의 집이 쓸데없이 멀리 있었던 탓에 큰길까지 내려오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지나가는 택시는커녕 마을버스도 없는 동네라고 했다. 땀도 나고, 화도 나고, 그리고 헛웃음도 났다.
한참을 걸은 끝에 여의도행行 버스가 있는 정류장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세 시가 넘었다. 양대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막 출발하려던 버스의 옆을 두드려 차를 세웠다. 기사가 짜증을 냈다. 미안하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데 저 멀리 신문사의 전광판이 보였다. 속보速報가 한창 쏟아지는 중이었다.
대법원, 전두환 무기 징역, 노태우 17년형 선고.
그것은 1997년 4월 17일, 아직도 내가 그날을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에필로그
스마트폰, 핸드폰은 고사하고 PCS도 나오기 전이었다. 유일한 연락 수단은 삐삐와 공중전화였다. 버스에서 뒤늦게 확인한 내 삐삐에는,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숫자들로 가득했다. 8282, 1818, 2828. 당연히 양대리였다. 한숨부터 나왔다. 하지만 어차피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부장님과 양대리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하루 종일 어디에 다녀왔는지를 추궁했다. 양대리는 내가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을 거라며 경찰에 신고하기 직전이었다고 했다. 나쁜 사람.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서류를 보낸 것,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산 것, 그리고 공원에서 만난 영감님에게 그것을 준 것. 그러나 영감님의 집에 갔던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대신, 공원 벤치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고 둘러댔다. 그 말에 양대리가 또다시 욕을 한 사발 퍼부었다.
그날 이후에도 탑골 공원 앞을 지나다가 그 영감님을 본 적이 한두 번 더 있다. 그때마다 영감님은 여전히 혼자였고 여전히 노숙자 행색이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사윗감 후보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고 또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