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지라고 불러도 좋을 행색이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삐진 데다 세수는커녕 양치질도 못하고 나선 길이었다.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시에 맞춰둔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아내의 비명 소리가 먼저 잠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아악, 오빠! 깐돌이가 나오려는 것 같아.”
깐돌이는 우리 아기의 태명胎名이었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출산 예정일을 가늠하는 듯했다. 그리고 언제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퇴근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오라는 다짐을 받는 것도 여러 날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집에서 십분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를 다녔었다. 그런데 비상사태를 대비한 머릿속 연습은 막상 상황이 닥치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이것 챙겨라, 저것 넣어라 애써 진통을 참아가며 소리를 지르는 아내의 채근에, 졸지에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축하 음악을 틀고, 촬영을 시작한다는 등 혼자서 열심히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소동 끝에 아내가 분만실 침대에 누운 것이 아침 다섯 시 반 즈음이었다. 지척에 사는 장모님이 급히 달려오셨다. 회사와 본가本家를 비롯해 필요한 곳에 연락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아홉 시를 넘겼다. 그러나 열한 시가 다 되어도 분만실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나온 간호사가 내게 그랬던 것이다. 처음 보는 아빠의 얼굴이 이렇게 지저분하면 아기 기분이 어떻겠어요? 간호사의 웃음 섞인 농담도 그 순간만큼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아내의 소리를 들으면서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양치질을 마치고 막 샴푸를 하려던 참이었다. 혹시나 싶어 욕실로 갖고 들어온 전화기가 요란한 벨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성난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보호자분, 지금 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아까 그 간호사였다. 아니, 간호사님이 집에 가서 씻고 오라고… 닥치고 빨리 병원으로 오란다. 미처 헹구지도 못한 거품을 수건으로 대충 닦았다. 비상등을 켜고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인생 선배님들이 보신다면 별 호들갑을 다 떤다고 하셨겠지만 그날의 모든 일들이, 그리고 모든 상황이 내게는 하나같이 처음이었다.
승강기를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달려 올라갔더니 간호사가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뜸 서류판을 건네며 사인부터 하란다. 이게, 뭡니까? 수술 동의서예요. 네? 수술 동의서요? 무슨 수술? 짧게 한숨을 내쉰 간호사가 보험 판매 방송의 성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말했다.
어쩌고 저쩌고 자연 분만을 하려고 했으나 난산難産이 예상되어 결국 제왕절개를 하는 것 어쩌고 저쩌고. 앞뒤를 따지거나 서명을 할지 말지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간호사에게 다시 물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술하면 문제없습니까? 뿐이었다. 간호사가 냉정하게 답했다. 문제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여기에 서명하는 거예요. 아, 그 문제가 아닌데. 어찌 보면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었다.
서명을 하기 전에 대충 종이를 훑어보았다. 그중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술 도중, 수술 결과, 어떤 일이, 어떤 일이, 그리고 어떤 일이. 긴장한 탓이었을까? 갑자기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별일 없겠죠? 서명한 서류를 주면서 또다시 물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빼앗듯 서류를 채더니 사무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선 장모님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원래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대신 입양을 계획했다. 특별히 종교적이거나 개인적인 신념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우리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 고민한 결과였다. 그래서 우선 양쪽 부모님을 설득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약간은 보수적인 아버지는 적극 찬성한 반면 신여성新女性이라 불러도 좋을 장모님이 극구 반대하셨다. 이유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에 우리의 고민이 너무 다정했던 걸까? 아내가 아이, 깐돌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내가 중국 상해上海로 출장을 가 있을 때였다.
다른 임부妊婦와 마찬가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꽤나 유명한 산부인과를 정해서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고 출산 준비를 했다. 아내의 정기 검진일에는 나도 일정을 조정해서 함께 병원에 갔다. 임신 기간에 아내를 섭섭하게 하면 평생 동안 원망을 듣는다는 것을, 회사의 선후배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임신을 하게 되면 눈에 띄게 체중이 불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던데 아내는 오히려 결혼하기 전보다 더 마르기 시작했다. 임신 3개월 차가 되었을 때는 볼이 옴폭 패일 정도로 살이 빠졌다. 그리고 제대로 앉아 있기도 어려울 만큼 통증이 심했다. 보다 못해 걱정이 되어 정기 검진일을 며칠 앞두고 병원을 찾았다. 물론 나도 동행했다.
그 자리에서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악성 근종이란다. 일반 여성의 자궁에는 크고 작은 근종이 있는데 아기가 자리를 잡으면 그것들이 작아지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내의 경우에는 근종이 양분을 다 빨아들여서 오히려 자꾸만 커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아기가 운동할 공간이 좁아져서, 경우에 따라서는 산모와 아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임신 중이라서 약을 쓸 수도 없고, 그저 방법이라고는 힘들어도 참았다가 순산順産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내는 3개월 단위로 찾아오는 주기적인 통증을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제왕절개 역시 그 근종 때문이라고 했다. 좁은 공간 때문에 아기가 탯줄을 목에 감았다고 했다. 자연 분만은 절대 불가능하다. 수술을 해야 한다. 새벽 댓바람부터 유도 분만제와 무통 주사까지 맞으며 자연 분만을 준비했던 아내는 결국 수술을 받게 된 것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시계는 이미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 흔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분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간호사가 무언가를 품에 안고 나왔다. 분명 우리 아기인 듯했다. 하지만 방송에서 본 신생아들은 세상 떠나갈 만큼 우렁차게 울던데 이상하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없었다. 지극히 찰나의 순간, 나는 쓸데없이 청승맞은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간호사가 내 앞에 서서 안아보라며 아기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주 건조한 말투로 그랬다.
“아들입니다. 눈, 코, 입, 귀 확인하세요, 손가락 열 개 확인하세요, 발가락 열 개 확인하세요. 이상 없죠? 그리고 아기 몸무게, 1.9킬로그램입니다.”
1.9 킬로그램. 내 손으로 겨우 두 뼘 조금 더 되는, 너무나 작은 아기, 바로 깐돌이였다. 깐돌이는 신기하게도 울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자 내 속에서 뜨끈한 것이 올라왔다.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섰던 장모가 울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크헉크헉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삐져나왔다.
간호사가 다시 깐돌이를 안고 간 다음에도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건 말건 장모와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끌어안고 통곡하듯 울었다. 겨우 1.9 킬로그램의 우주가 내게로 온 날, 그날이 바로 2005년 6월 20일이었다.
깐돌이는 결국 다음날 아침 분당의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신생아 황달이 왔다고 했다. 아들은 새로운 세상에 나온 지 하루 만에 인큐베이터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한동안 그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첫 날들을 보내야 했다. 지인들이 그랬다. 어른들 말씀에 작게 낳아 크게 키우라고 했다고, 분명 복 받은 아이일 것이다. 아들에게 전하는 덕담과 내게 주어지는 위로가 그저 고마웠다. 그러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깐돌이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울고 서 있는 우리 부부에게 분당 제생병원 산부인과 과장님이 걱정 말라는 위로와 함께 그러셨다.
“부모님들이 이렇게 마음 졸이며 낳고 키워주신 걸, 이 아기가 나중에 알까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선생님 말씀이 옳다. 아이가 이 날들을 알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내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전부 기록해 보자. 어떤 내용이 기록될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당장 적을 수 있는 것은 태어난 날로부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순간까지지만, 앞으로의 일상을 기록해둔다면 그건 아이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며칠을 소급해서 깐돌이가 태어난 2005년 6월 20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태명을 따서 깐돌 일기로 정했다. 아들이 올해 열여섯 살이니 지금은 시즌 16이며, 20일 자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21일부터 시즌 17이 다시 시작된다. 마지막 일기는 아들이 성인이 되는 스무 번째 생일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의 일기를 책으로 만들어서 아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사진과 자료를 넣고 고쳐쓰기를 수시로 합니다
처음 한동안은 육아일기였다가 어느 정도 지난 시점부터는 성장일기로 바뀌었으며, 최근 들어서는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른바 꼰대 어록으로 가득 찬 이상한 일기로 변질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들이 이 일기를 받고서 지난 이십 년간의 의미를 짧게라도 되짚어준다면 부모인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또다시 6월 20일이 되었다. 아들의 생일을 맞아 지나간 시간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아들아,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제발 엄마 말씀 좀 잘 들어라. 너 때문에 그 구박, 아빠가 다 받고 있는 것 정말 모르겠냐? 어쨌거나 사랑한다. 그리고 겨우 1.9 킬로그램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잘 자라준 것에 대해서도 정말, 정말 고맙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더욱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