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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26. 2021

내 마음의 옥탑방

< 작당모의(作黨謨議) 4차 문제(文題) : 심수봉 >


   “오백에 십오만 원, 싫음 말고.”


   한참 만에 복덕방 영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이다. 내가 가진 돈의 액수를 말했을 때부터 그의 표정은 이미 바뀌었다. 보증금이 적으면 그만큼 복비福費도 줄어들 것이다. 내 앞에 놓인 박카스를 도로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영감의 짜증은 더욱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의 집값에 대해 무지無知했던 내 잘못이 컸다. 고작 입사 일 년 차임에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큰 행운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를 홀대해도 되냐는 간 큰 너스레에, 인사 담당 상무가 흔쾌히 사택社宅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 준 덕분이었다. 그래서 여의도에서의 일 년 동안, 집값 따위는 나의 관심 사항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유롭고 편안한 무료 주거가 천년만년 계속 이어질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해 늦가을, 난데없이 툭 떨어진 아이엠에프IMF라는 이름의 도깨비는 나의 현실 자각 과목에 에프F 학점을 주었다. 해가 바뀌고 삼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불용자산不用資産은 모두 정리한다는 회사 방침에 따라 내가 살던 사택도 하루아침에 처분 대상이 된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이 주일이었다. 보름 남짓한 동안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그제야 벼룩시장 몇 부를 숙소로 가져와 구석구석 정보를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픈북 테스트였음에도 새로운 집에 대한 정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격주 근무인 토요일 하루를 골라 마포대교를 넘었다. 사옥社屋이 보이는 다리 하나 건너의 위치라면, 여의도 역과 여의나루 역을 헷갈리는 천하의 길치라 하더라도 최소한 집을 잊어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마포 가든 호텔의 뒤로 들어서자마자 우선 눈에 띄는 부동산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평생 동안 부동산 중개만 해 왔어,라고 얼굴에 씌어있는 영감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우리 잘 생긴 손님은 뭘 찾으시나? 아파트? 오피스텔? 구매? 전세? 대략 얼마 정도 생각하시나요?”

   준비된 대사인양 속사포처럼 선택 사항을 줄줄 읊던 영감님이 곧 박카스 한 병을 내밀며 소파의 자리를 권했다. 조금만 더 천천히 답을 했더라면 나는 그것을 충분히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 금액이면 부산에서 방 두 칸에 부엌 하나는 충분하다고 그랬지? 혼자 살림인데 방이 두 개면 뭐하겠어? 나는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 호기롭게 말했다.

   “뭐, 오백 정도는 충분히 있습니다.”


   복덕방 영감의 입 모양이 욕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만 기억하고 싶다.




   이삿짐은 단출했다. 작은 트럭 하나로 충분했다. 짐을 대충 다 옮겼을 때 주인집 할아버지가 올라왔다. 할아버지는 미국 영화배우 모건 프리먼을 꼭 닮았다. 이 분의 편안하고 푸근한 인상이 아니었다면, 오백에 따라붙은 십오, 그러니까 월세 십오 만원이라는 조건은 말다툼과 거절의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복덕방에서부터 나를 ‘미스타 임’이라고 불렀다.


   “미스타 임, 방은 그리 크지 않지만 혼자 지내기엔 충분할 거예요. 내가 작년에 단열 공사도 다 했으니까 여름에 덥지도 않을 거고. 마포에서 이런 깨끗한 옥탑방 구하기 힘들어. 월세는 편할 때 줘요. 대기업 다니는데 그런 걱정 뭣 하러 하겠어?”


   그랬다.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124번지. 연립 주택의 4층과 푸른 하늘 사이에 자리한 곳. 옥상에 있으니 ‘옥’이며, 높으니까 ‘탑’일 것이다. 집이라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방’이었다. 그래서 딱 세 글자, 옥, 탑, 방. 오늘부터 여기가 나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이다. 현실 자각 과목에 재수강 신청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4월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침대와 책상, 행거의 옆으로 작은 밥상 하나 놓을 공간만 남았다. 가스 레인지를 올린 싱크대 아래에는 모텔용 꼬마 냉장고 하나를 들였다. 샤워기가 달린 화장실이 방 안에 있었다. 변기에 정면으로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았다. 옆으로 걸터앉으니 문이 닫히지 않았다. 하지만 볼 사람이 없으니 숨길 필요 없는 장면이라 굳이 문을 닫을 이유도 없었다. 자세는 정해졌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고 했지만,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니 바깥 날씨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방보다 네 배는 더 넓은 옥상 전체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별 가득한 밤하늘과, 발아래로 펼쳐진 화려한 야경 또한 모두 내 것이었다. 여의도에서 마포로 건너온 첫날밤, 모건 프리먼을 남겨 두고 탈옥에 성공한 팀 로빈스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한껏 벌린 채 나만의 자유를 실컷 즐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난데없는 소리에, 벌렸던 팔을 재빠르게 걷어들였다.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주인집 따님이신가? 내 딸과 전 재산을 자네에게. 소리가 나는 곳은 높이를 나란히 하는 바로 옆 건물, 마찬가지로 옥상이었다. 그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어 걸음 다가갔다.


   “오늘 이사 오셨어요?”


   저 쪽도 한걸음 다가오는 듯했다. 그제야 달빛을 받은 상대의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 여자였다. 뒤로 묶은 긴 머리에 하얀 티셔츠를 편하게 입었다. 난간에 가려서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여자의 입에서 흰 연기가 후욱 뿜어져 나왔다.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고지식했다. 여자가 담배라니. 아, 네. 대충 성의 없는 답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곧장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보아하니 술집 여자겠군. 그러니까 이런 옥탑방에 겨우 사는 거지. 담배나 피우면서 말이야. 처음 이사 온 날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방해받았다 싶은 생각에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저녁은 회사에서 먹었다.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둔 평상에 걸터앉았다. 하늘에 달이 두둥실 떴다. 마음은 한없이 편했다. 나중에 집을 지으면 반드시 하늘이 보이는 테라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수준급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제 그 여자였다. 입에 담배를 문 채 기타를 치는 것이었다. 확실하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나 보네. 그 모습이 보기 싫었고 그 소리도 듣기 싫었다. 다시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이사를 잘못 왔다는 생각을 그날 처음 했다.




   그런 날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내가 밤 시간을 즐기고 있으면 여자가 기타를 치며 담배를 피웠다. 아니, 담배를 피우며 기타를 쳤다. 그때마다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어쩌다 내가 늦게 귀가하는 날에는 여자가 먼저 기타를 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옥상에 나가지 않았다. 두 평이 채 안 되는 좁은 방에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나쁜 년. 짜증이 났다.




   모처럼 기타 소리도, 담배 연기도 없는 밤이었다.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자식 자랑을 하다가 내려갔다. 어느덧 이사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매일 같이 들리던 기타 소리와 밤공기를 타고 전해지던 담배 냄새도 하루를 건너뛰면 궁금해질 때가 가끔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옥상에 나왔고, 한참이 지나도록 담배 냄새도 없었다. 출근했나 보네. 상관없지 뭐. 상쾌하니 좋은걸.


   “이제 인사 정도는 하면서 지내도 좋지 않을까요?”

   말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역시 그 여자였다. 반가운 척하면 안 된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뒤로 묶은 머리에다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난간 위로 한쪽 발을 올리더니 이쪽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저, 저런. 위험한데, 그러면 안 되는데. 아무리 다닥다닥 붙은 건물이라 하더라도 족히 일 미터는 넘을 텐데. 간도 참 크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그저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와아, 저쪽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좋네? 너른 평상도 있고. 반가워요.”

   성큼성큼 걸어온 여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여자가 억지로 내 손을 끌어다 자기 손에 쥐었다. 그리고 두어 번 흔들었다. 부끄러웠다. 시선 둘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손을 맡긴 채 애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렇게 익은 달이 킬킬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강희, 그녀의 이름은 강희였다. 성이 강이고 이름이 흰지, 아니면 성이 따로 있고 이름이 강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스스로를 강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키는 작지 않았고 피부가 하얀 편이었다. 눈은 아주 컸다.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 대신 렌즈를 낀다고 했다. 고향은 천안이었고, 원서동에 있는 외국 대사관에 근무한다고 했다. 술집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나이는 모른다. 말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주고받은 대화로 미루어보면 비슷한 또래거나 한두 살 터울일 수도 있겠다. 서로 말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깍듯한 존댓말은 아니었다.


   회식이나 야근이 없는 날은 그래서 곧장 집으로 왔다. 주인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성실하다고 칭찬했다. 속내를 모르니 하는 말이었다. 집에 오기가 무섭게 샤워부터 마치고 로션을 바른 다음, 향수까지 뿌리며 옥상에 나갈 준비를 했다. 기타 소리가 들려오면 이때다 싶어 방문을 열고 나갔다. 기다리다 못해 먼저 나가 한참을 서성거리고 있으면, “아, 미안”하면서 강희가 늦은 인사를 걸어올 때도 있었다. 매번 강희가 난간을 건너오는 것에 미안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세 번에 한 번은 내가 건너갔다. 하지만 평상이 있는 내 옥상을 강희는 더 좋아했다.


   매번 강희의 분신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기타였다. 그녀는 자주 물었다.

   “무슨 노래 좋아해?”

   그저 질문에 그쳤다. 이승철을 좋아한다고 여러 번 말했어도 그것을 연주해 주지는 않았다. 강희의 첫 연주는 항상 똑같은 것이었다. ‘그때 그 사람’. 심수봉의 노래였다. 뒤를 이어 들려주는 곡들도 하나같이 구슬픈 곡조였다. 하지만 언제나 기타만 칠 뿐 강희는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귀 호강에 미안함을 느낀 내가 조심스럽게 “비가 오면 생각나는” 하고 첫 구절을 읊조리기라도 하면 기타를 뚝 멈추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조용히 듣기 바람!”


   강희의 옥상으로 건너갈 때는 잊지 않고 동네 가게에서 맥주를 샀다. 고급 연주를 듣는 입장료라며 나는 재미도 없는 농담을 주절거렸다. 그리고 담배 던힐Dunhill 한 갑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렇게 싫었던 담배 연기는 익숙하다 못해 어느새 구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밤마다 두 집의 옥상을 오가는 것이 동네 사람들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내가 강희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주인집 할아버지가 우리 사귀는 거냐고 물어보던데.”

   “그래서 뭐라 답했어?”

   강희의 보조개가 살짝 패었다. 어떤 답을 기대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나 역시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지, 뭐.”

   그걸로 끝냈어야 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로 끝내기엔 무언가 허전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쓸데없는 말을 굳이 덧붙였을까?

   “그런데 심수봉 노래, 너무 청승맞지 않아?”


   도대체 왜?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갑자기 강희가 기타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심수봉 노래가 청승맞다는 말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이제 여기로 오지 마. 나도 안 갈 거니까!”

   벌떡 일어서더니 강희는 방문을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상황 파악이 쉽게 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그날 이후로 한참 동안은 강희의 기타 연주를 들을 수가 없었다.


   가을이 지나고 바람이 차가워졌다. 어느새 겨울이 오고 있었다. 그날은 강희의 방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연주를 듣던 날이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싶어 자리를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강희가 기타를 멈추더니 뜬금없이 그랬다.

   “내 방, 구경할래?”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궁금했다. 침대는 어떻게 생겼는지, 책상은 또 어떤 색깔인지, 행거는 높이가 어떻게 되며, 가스 레인지는 어떤 브랜드인지, 냉장고는 이단인지, 화장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그 방에선 내 방이 어떻게 보이는지. 나는 강희의 손을 슬그머니 떼어놓았다. 난간을 뛰어넘어 내 방 앞에 와서 다시 강희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다음날부터는 출장이었다. 목적지는 중국 난퉁 Nantong 南通. 면실박 Cotton Seed Meal 하역 작업을 참관해야 했다. 면실박은 목화의 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를 말한다. 이것을 가공하여 동물의 사료로 쓴다. 면실박을 실은 운반선은 5천 톤 급이었다. 그런데 출장 첫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기雨期가 아님에도 비가 사흘을 내리 퍼부었다. 하역을 하기 위해서는 배의 갑판[해치]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비가 오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꼬박 일주일 동안 비가 내렸다. 본사에 연락을 했다.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본사로 복귀했다가 다시 출장 나오겠다고.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 대리의 걸쭉한 욕이 돌아왔다. '너는 사무실에 안 보이는 것이 회사를 도와주는 거다.'


   익숙한 꾸지람의 끝에 뜬금없이 강희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녀의 연락처는커녕 명함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도 당연히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그저 서로의 이름만 겨우 알고 지냈던 것이다. 아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역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무려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예상 외의 장기 출장으로 몸은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강희가 궁금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 대충 정리를 마치고 옥상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녀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밤이 늦도록 기다렸지만 기타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만나겠지 싶어 눈을 감았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당연히 늦잠을 잤다. 서둘러야 했다. 양대리의 성난 얼굴이 멱살을 잡아끌었다. 서두르는 인기척을 들었는지 주인집 할아버지가 계단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는데 작은 메모지를 내게 먼저 건넸다.


   “미스타 임. 옆집 옥탑방 아가씨, 얼마 전에 이사 갔어. 미스타 임을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고, 이걸 전해주라던데?”


011-3*9-5*39 강희


   아, 그랬구나. 그래서 안보였구나. 하지만 우선은 시간이 없었다.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메모지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게 실수였고 또 잘못이었다. 차라리 돌아오는 길에 받겠다며 할아버지에게 그냥 맡겨두었어야 했다.


   회사에서 집까지 오가는 동선을 좇아 두 번이 넘게 왕복을 했다. 그러나 메모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분명 바지 주머니에 넣었는데, 없다. 화가 났고 결국 욕이 튀어나왔다. 아, 그렇지. 원서동에 있는 대사관이라고 했지?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강희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 직원은 없다고 했다. 설령 있다고 해도 함부로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인정머리 없는 답을 들어야 했다. 옆집 주인아저씨를 찾아갔다. 옥탑방 계약서에도 그녀의 연락처는 없었다. 나는 결국 그녀를 찾지 못했다.


   텅 빈 옥상에서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더 이상 기타 소리도,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또 토요일이 되었다. 멍하니 드러누워서 오후 반나절을 보냈다. 저녁 무렵 즈음에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옷을 걸치고 근처의 레코드 가게로 달려갔다. 심수봉의 시디를 전부 달라고 했다. 이런 팬은 처음이라며 가게 사장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때처럼 또 달이 떴다. 평상 위에 시디 플레이어를 두었다. 버튼을 누른다. 너무도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 강희가 기타로 연주했던 것들이 모두 심수봉의 노래였구나. 방금 전 것도, 이것도 모두 이런 노랫말을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노래를 듣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옥탑방이 눈에 들어온다.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기타를 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내게 손짓한다. 이리 오라고, 이 쪽으로 건너오라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맥주와 담배를 잊지 않고 챙긴다. 난간에 한쪽 발을 올리고 바닥을 밀어낸다. 일 미터의 간격을 펄쩍 건너뛰어 그녀의 땅으로 내려선다. 손잡이를 조심스레 잡는다. 천천히 돌린다. 그녀의 방문이 기다렸다는 듯 스르륵 열린다. 그토록 찾았던 그녀가 거기에...




   하필이면 삼십 도를 오르내리는 더운 날을 골라 아내는 며칠째 짐 정리 중이다. 한번 꽂히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 때문이다. 보관 장소가 마땅치 않다며 계속 불평이길래 뭔가 봤더니 오래전 비디오테이프와 시디들이다. 옆에 앉아 거드는 척하며 타이틀을 하나씩 훑어본다.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물건들이 내 손에서 아내의 손으로 건네진 다음, 상자에 차곡차곡 담긴다. 어떤 것에 이르자 내 손이 멈추었다.

   “이것도 정리하려고?”

   “응, 오빠. 왜? 그건 버리지 말까?”

   “아냐, 버려도 돼. 그냥 물어본 거야.”

   내가 건넨 시디 꾸러미를 받아 든 아내가 혼잣말을 한다.


   “이 노래, 너무 청승맞은 것 같아. 이제 그만 들을 때도 되지 않았어?”


   대답을 하지 않고 담배를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그것들을 박스에 두든, 내다버리든 이제는 상관없다. 매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사람이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비가 오면 생각날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어디에선가 어쩌다 한 번쯤은 나를 생각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처럼 구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뜬금없이 눈이 매웠다. 노래가 청승맞지 않냐는 말에 갑자기 화를 냈던 그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바닷바람 불어오고 나의 사계절 잠 깨우니 개나리 활짝 피고 봄은 또 가는데

한번 본 그 얼굴이 다가와 감싸던 그 팔이 그날 밤 그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나

날이 밝으면 떠나야 하는 만나선 안될 사람을 한 번만 다시 또 한 번만 만나고 싶어

단 한번 맺은 사랑이 마지막 종말일지라도 끊을 수 없는 마음은 어제도 오늘도


나의 사계절 (심수봉 작사, 작곡 / 1985 / 한국 음반)



* 제목은 1999년도 제23회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박상우 작가님의 소설 제목에서 차용하였습니다.

* Image by S. Hermann & F. Richter from Pixabay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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