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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ug 01. 2021

그까짓 공항장애 쯤이야

내가 깜빡했군요, 쏴리


1995년 가을,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모 그룹의 공개 채용 시험에 합격했다.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 회사에서는 합격생을 대상으로 최종 예비 소집을 진행했다.  참석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부산에 살던 내게는 왕복 비행기 표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나는 설레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처음 하게된 서울 구경인 데다, 비행기를 타는 것 역시 '난생처음'기 때문이었다.




행여 잃어버릴까 싶어 티켓을 두 손에 꼭 쥐고 긴장하며 공항 로비에 앉았다.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이 너무도 뻔한, 그저 흔한 촌놈탑승객이었지만, 마치 극비 작전을 준비하는 제임스 본드처럼 혼자서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하며 오만가지 똥폼을 잡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안내 방송이 나왔다.

탑승권을 다시 한번 본 다음, 입구라고 적힌 곳으로 향했다. 앞서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슬쩍 넘겨보았다. 아하, 티켓을 저 직원에게 보여주고 확인을 받는구나, 쉽네? 곧 내 차례가 되었다. 순간 제임스 본드가 빙의되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직원은 네,라고 대답했다. 건성이었다. 하긴, 오래 서 있으면 꽤나 피곤하겠지. 그런데 내 탑승권을 살펴보던 직원이 대뜸 그런다.

“아직 좌석을 배정받지 않으셨네요? 빨리 카운터로 가셔서 좌석을 받아 오세요. 여권은 필요 없구요.”

그러면서 티켓과 여권을 돌려주었다. 당황스러웠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분명 탑승권이 여기 있는데. 본사가 직접 보내준 건데. 구매 확인서라도 첨부해야 하는 걸까? 일단 후퇴. 그렇게 조용히 물러섰으면 적어도 그날 밤의 이불 킥은 없었을 것이다. 순간 창피해진 제임스 본드는 그래도 꼭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었나 보다. 이마를 살짝 터치하는 제스쳐와 함께.


아차, 내가 중요한 걸 깜빡했군요.
고마워요, 아가씨.


비행기 탑승이 처음이었던 나는, 좌석을 미리 별도로 배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버스도, 기차도 그렇지 않았다. 표를 사면 당연히 좌석 번호가 찍혀 있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인 줄 알았다. 왜? 더 비싼 거니까! 설마 본사에서 좌석이 없는 입석 표를 보냈겠어?

뒤에 섰던 누군가가 피식 웃었던 것 같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차라리 입을 다물 일이지, 재빨리 카운터로 가서 좌석을 받을 이지, 젠장. 고작 한다는 소리가 뭐어? 중요한 걸 깜빡했다고?

그리고 비행기를 타려면 무조건 여권을 챙겨야 하는 걸로 알았다. 서둘러 여권을 발급받느라 시청을 오갔던 지난 며칠이 떠올랐다.




공항과 나의 질긴 악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략 삼십여 개의 나라로 출장을 다니는 동안,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겪지 못했을 일들이 희한하게도 내게는 줄줄이 일어났다.


여행 자유화가 된 직후에도 군필자는 출국 탑승 전에 병역 이행 확인서를 제출해야 했다. 첫 해외 출장 때 김포 공항에서 그것 때문에 사달이 났었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는 마약 운반범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중국 북경에서는 범죄 용의자로 몰려 공안公安에 끌려가기도 했다. 몽타주를 확인했는데 내가 봐도 정말 닮았다. 그건 절대로 공안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프랑크 푸르트 공항에서는 싱가포르 승객과 여행용 가방이 바뀌어서 출장 기간 내도록 여자 속옷 구경은 원 없이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는 입국 서류를 잘못 썼다. 당신은 금지품목을 운반하고 있습니까? 네. 당신은 입국 금지 조치를 당한 적이 있습니까? 네. 당신은 이 나라에 위험한 사람입니까? 네. 러시아 글자를 내가 알 턱이 있나?

내 팔을 부러져라 꺾었던 공항 경찰 세르게이, 당신 이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영어로 된 서류를 달라는 게 그렇게 잘못이야?


이쯤 되니 공항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경까지 되었다. 심지어 공연한 긴장 때문에 전날 밤 잠을 설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름하여 그것은, 나만의 공항 장애인 것이다.


공항 장애 Airport Disorder

예기치 못한 일로 공항에서 난처함을 겪을까 봐 미리 불안해하는 증세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공연한 엄살이거나 웃기려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던 아내 역시 마닐라 공항에서 그 일을 함께 경험한 뒤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오빠, 정말 공항 장애 생길 만하네. 그렇지? 내 말 맞지? 왜 하필이면 내가 환전한 것 중에 가짜 폐가 섞여 있냐고!




어쩌다 뉴스에서 공항의 전경을 비춰주기라도 하면 그 일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제는 추억이지만 어제 처럼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공항을 마지막으로 이용한 것도 일 년 전이다. 코로나 때문에 하늘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단순 여행이나 출장이 전부인 나도 그럴진대 해외 관광객의 왕래를 업業으로 삼고 계신 분들의 고충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내게 늘 일어나는 공항 장애쯤은 얼마든 기꺼이 감수할 테니 어서 빨리, 하루 빨리 이 지긋지긋한 사태가 해결되고 모두가 공항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날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어려움을 꿋꿋이 버티고 계신 스페인 한량 작가님손봉기 작가님, 그리고 여행업 및 해외 물류 사업에 몸담고 계신 모든 분들의 건투를 진심으로 빕니다. 모든 것이 뜻과 같이 원래대로 잘될 것입니다. 파이팅!!"




Image by Hands off my tags! Michael Gaid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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