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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31. 2021

뭐라도 해야지

놀면 뭐하니


있는 힘껏 경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다.


애당초 경수를 상대로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녀석은 우리 반에서 싸움을 제일 잘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들리는 말로는 삼촌도 깡패라고 했다. 책상을 밟고 가볍게 뛰어올라 공중 이회전을 한 다음, 멋진 돌려차기로 확실하고 깔끔하게 끝장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열두 살짜리들의 주먹다짐이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정신없이 휘두르다가 운 좋게 한 방 얻어걸리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뒹굴며 투닥거리던 중에 어느 하나가 먼저 코피라도 터지면 겨우 끝나는 것이 싸움의 법칙이었다.


말리려는 건지, 응원하려는 건지 속셈을 알 수 없는 녀석들의 가운데서 한참 동안 치고받는데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그만 두지 못해?”

선생님이었다. 그때, 경수가 내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이 새끼, 심판이 멈추라고 했는데. 비겁한 놈!


“누가 먼저 때렸어?”

내 콧구멍을 솜으로 막아주면서 선생님이 물었다. 경수가 슬쩍 나를 흘겼다.

“넌 경수를 때렸어?”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나는 경수를 노려 보았다. 경수가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물었으니 답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코피는 아니었다. 공연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슴팍이 찌릿했다. 눈을 질끈 감고 웅얼거렸다.


“경수가 나한테 식모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평소 친하지도 않은 경수가 어슬렁거리며 내 자리께로 왔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겠다는 말투였다.

“야, 반장! 너희 엄마, 식모 맞제?”

뜬금없는 소리였다. 엄마가 식모라니. 그 소리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당연히 발끈했다.

“무슨 소리고? 죽고 싶나?”

“내가 직접 봤다. 너희 엄마, 복개천 파란 대문 집에서 식모살이하는 거, 내가 어제 봤다.”

“꽁 까지 말고 저리 꺼지라, 임마.”

“와? 식모라 하니까 기분 나쁘나? 내기할래? 백 원 내기. 근데 식모 아들이 돈이 있겠나?”


반 아이들의 시선이 아까부터 거슬렸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경수의 이죽거림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끼리 통용되던, ‘식모’라는 말에 담긴 비하는 더욱 싫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보다 싸움을 잘하든, 붙어봤자 질 게 뻔하든 그건 다음 문제였다. 일단 주먹부터 날렸다. 그리고 곧 엉겨 붙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먼저 때린 것은 아니다. 그 주먹은 빗나갔기 때문이다.


벌 청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설 때까지 경수는 내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씩씩거리면서 코를 불었다. 화가 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직접 가 보기로 한 것이었다. 내 눈으로 보고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내 말이 맞으면 니는 인자 공식적으로 식모 아들이다, 알겠나?”

“닥치라. 거짓말이면 니는 각오해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 엄마는 항상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엄마가 왔다. 그냥 일하러 다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못 살았으니까. 아버지가 열심히 돈을 벌고 엄마도 부지런히 일해야, 그래야 잘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엄마가 다른 일을 하는 건 괜찮은데 제발 식모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기세 등등한 경수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오직 그 생각만 했다. 식모만 아니었으면, 제발 식모만 아니었으면.




파란 대문 집이 건너다 보이는 복개천의 이 쪽 골목 끝에서 고개만 겨우 내밀었다. 경수는 여전히 내 옷자락을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콧구멍을 막았던 솜을 뺐다. 덩어리진 피가 붉게 배어있었다. 경수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두고 보자, 나머지는 욕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각만큼 얼추 해가 기울었다. 철컹 소리가 나더니 마침내 파란 대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누군가 나왔다. 엄마였다. 아…

“이래도 내가 틀렸나? 니, 내가 말했제? 너희 엄마, 식모라고. 내일부터 니는 각오해라.”

경수가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화단 뒤로 몸을 바짝 낮출 뿐이었다. 엄마는 이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윗동네를 향해 잰걸음을 서둘렀다. 경수가 내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옷을 털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준비를 하던 엄마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일찍 와서 동생이랑 놀아주지 않고 왜 이렇게 늦었냐고 나무랐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왔다고 했다. 나는 전에 없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씻고 숙제를 했다. 여동생과 놀아주다가 일기를 썼다. 그날 내가 본 것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이 들려고 할 때, 갑자기 궁금해졌다. 경수 녀석은 우리 엄마가 식모인 것을 두고 왜 그렇게 호들갑이었을까?


다음날, 경수가 은근히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의 일을 따지지도 않았고, 반 친구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새 잊어버렸나? 단순해서?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얼핏 나누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이삼주 정도 지났다.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엄마가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와? 엄마한테 할 말 있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있잖아. 파란 대문 집에서 일 안 하면 안 되나?”

그 말에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엄마는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 하던 일을 계속 이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엄마가 짧게 한마디를 했다.

“뭐라도 해야지. 놀면 안 된다 아이가.”

뭐. 라. 도. 해. 야. 지. 순간, 그 여섯 글자가 저 쪽에서 날아와 내 가슴에 팍 박혔다. 내가 열두 살, 오 학년이던 1982년이었다.




불경기라고 했다. 어른들 말로는 부자 나라 미국이 어려워져서 우리도 힘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노는 날이 더 많아졌다. 철없는 나는 그게 마냥 좋아서 아버지의 한숨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버지는 몇 푼 안 되는 허드렛일이라도 거리를 따지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삼 남매가 학교에 가면 엄마는 파란 대문 집에서 식모(정확하게는 파출부) 일을 했던 것이다. 집으로 와서는 스웨터의 실밥을 뜯고, 낚시 바늘을 꿰었다. 자다 깨서 화장실을 갈 때에도 엄마는 가끔 누런 종이를 접고 있었다. 누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나와 동생은 한참 자랄 때였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그때 우리 가족은 연립 주택 지하에서 월세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어떻게든 한 달을 꾸려야, 아니 버텨내야 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시절이었다.


뭐라도 해야지


그 말은 결국 내 좌우명이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뭐라도 해야지, 무엇이라도 하자.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마냥 주저앉아 신세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하자. 움직이자. 뭐라도 해야 된다. 그래야 기회가 온다. 남의 눈치 따위는 필요 없다. 우선은 내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생사가 달렸는데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 덜 힘든 것이다. 아직 제대로 어렵지 않아서 그렇다. 더구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면, 남의 시선이나 체면 따위는 일찌감치 잊어버려야 한다. 자존심일랑 출근길 신발장에 넣어두고, 퇴근해서 다시 꺼내면 된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필사적으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존심이다.




십여 년 간 운영해 오던 가게를 코로나 때문에 결국 접었다며 후배 대현이가 오래간만에 찾아왔다. 꽤나 유명한 나름의 맛집이었는데 세계적인 역병을 끝내 피하지는 못한 것 같다. 딸 둘에 아들 하나, 모두 다섯 식구다보니 우선은 생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단다. 우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자리 몇 개를 추천해 주었다. 해보지 않아 힘들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도전해보겠단다.


“뭐라도 하면서 버텨야죠, 형님. 고맙습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이 정답이다. 버티는 것, 그것이 어쩌면 최고의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이기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일단은 버텨야 한다. 뭐라도 하면서 말이다. 대현이의 건투를 빈다. 재기再起는 당연히 내가 도울 것이다.




Image by kepinato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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