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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Sep 08. 2021

환상 특급

< 작당모의(作黨謨議) 6차 문제(文題) : 달력 >


   종업원이 세 번째 소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동규는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어허 그것 참. 또 울어? 아직도 눈물이 남았어?”

   당황한 박 부장이 얼른 냅킨을 뽑아 동규에게 건넸다.

   “부장님, 커, 커억, 죄, 죄송합….

   콧물을 삼키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박 부장이 동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신입 때는 다 그런 거야.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겠어? 김 과장도 동규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게 절대 아냐. 모두가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지.”


   과연 그런 걸까? 정말 잘 되라고 그렇게 욕을 퍼붓는 걸까? 진심으로 내가 잘되라고 뺨까지 올려붙이는 걸까? 그것도 여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동규는 고개를 돌려 코를 팽 풀었다. 찐득한 것이 삐쳐 나와 손끝에 묻었다. 이런 젠장. 하루 종일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발단은 팩스였다.


   동규가 김 과장으로부터 받은 지시는, 협력업체로부터 팩스를 받아 회신을 보내라는 것이었고, 김 과장이 동규에게 한 지시는, 협력업체에 팩스를 보내서 회신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김 과장이 외근을 나가기 전에 한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 그러나 되물었다간 또 무슨 욕을 듣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동규는 일단 자신의 청력聽力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김 과장과 동규가 생각한 협력업체는 서로 다른 곳이었고, 두 개의 지시와 이행은 그래서 처음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외근에서 돌아온 김 과장은 동규가 건넨 팩스를 받아 들자마자 동규의 예상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폭발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아.”

   다짜고짜 터져 나오는 욕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동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 과장은 동규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재킷부터 집어던졌다.

   “넌 똑바로 할 줄 아는 게 대체 뭐야?”

   “그게 아니라, 전 과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김 과장은 벌게진 얼굴로 팩스를 갈기갈기 찢더니 그것을 동규의 얼굴에 사정없이 집어던졌다. 동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각조각난 종이들이 동규의 얼굴을 스치고 봄날의 벚꽃처럼 공중에 흩어졌다. 다른 파트의 직원들도 난데없는 소란에 하나둘 이 쪽을 쳐다보았다.

   “그냥 사표 써라. 제발 부탁이다. 우리 회사에서 사라지라고!”

   “과장님, 전 그냥 과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짜악! 순간 눈앞이 번쩍 했다. 김 과장이 동규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아프다기보다는 우선 당황스러웠고, 황당함을 느끼기 전에 부끄러움이 먼저 몰려왔다. 팀의 막내 소희 양이 저만치서 놀란 눈으로 동규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새끼가 죽을라구. 어디서 자꾸 말대꾸야?”

   김 과장이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 뺨에 손을 올린 채 동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자빠진 의자의 바퀴처럼 동규의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옆 파트의 박 부장이 퇴근 시간에 맞춰 동규를 뒷골목 고깃집으로 불러냈다. 화장실에 앉아 한 시간 넘게 눈물을 말리고 있던 참이었다.

   “동규야, 김 과장을 이해해라. 부장도 공석空席인데 일개 과장이 팀장 역할까지 하려니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겠니? 김 과장도 알고 보면 참 좋은 사람이다. 네가 이해해.”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알기가 너무 어렵네요. 동규는 속으로 생각했다. 박 부장이 다시 소주병을 들었다. 불판에 올려둔 고기가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요청을 하기도 전에 종업원이 먼저 달려와 판을 바꾸었다. 열 평도 채 안 되는 좁은 가게 안을 사람과 연기가 꽉 채우고 있었다.


   소주잔을 내려놓 젓가락을 집으려는데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올려다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려놓았다. 그것은 껌이었다.

   “할머니, 우리는 껌 안 씹어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박 부장이 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오히려 박 부장 앞으로 껌을 더 들이밀었다. 하나만 사 달라는 간절함이 얼굴에 묻어났다.

   “아이 참, 안 산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할머니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박 부장의 자비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할머니! 사람 말귀 못 알아들으세요? 가시라고요, 가!”

   갑자기 높아진 목소리에 움찔한 할머니가 껌을 도로 집어 들더니 조용히 돌아섰다. 할머니는 다른 테이블은 거치지 않고 곧장 출입문을 향해 종종걸음을 걸었다. 동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아, 그렇지. 우리 할머니. 동규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가 생각났다. 동규는 재빨리 달려갔다.

   “할머니.”

   걸음을 멈춘 할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껌 한 통만 주세요.”

   동규가 내민 천 원짜리를 보더니 할머니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야, 니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그저 착해 빠져서는.”

   박 부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마시던 잔을 들이켰다.

   “그냥, 저희 할머니 생각이 나서요.”

   동규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동규에게 유일하게 남은 핏줄이라고는 영월에 살고 있는 할머니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를 본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박 부장까지는 운 좋게 태워 보냈는데 정작 자기가 타려니 택시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차도에 내려서서 한참을 손을 흔들던 중에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박 부장의 강권에 못 이겨 주량을 넘겨가며 급하게 마셨던 탓이었다.

   전봇대를 부여잡고 서너 번 게워냈다. 내용물이 알찼다. 손수건으로 입을 대충 닦았다. 앉을자리를 찾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저기에 벤치 하나가 보였다. 힘들게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속을 비우고 나니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벌써 구월이다. 어느덧 서른 살. 동규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별이 보였다. 할머니가 있는 영월의 밤하늘은 여기와는 달리 별이 천지다. 할머니 생각이 다시 났고, 이어서 부모님이 떠올랐다. 역시 십 년이다. 스무 살이던 동규를 혼자 남겨 두고 부모님은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영월로 가던 고속도로에서였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놈의 눈물이 또 나오려고 했다.


   “누군가 했더니 착한 총각이었구먼.”

   난데없는 말소리에 동규는 깜짝 놀랐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벤치 끝에 앉아 있다. 언제 온 것일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동규는 미간을 모아 자세히 보았다. 아, 할머니. 아까 고깃집에서 껌을 팔던 바로 그 할머니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가움이 느껴졌다.

   “할머니. 할머니셨군요?”

   아까 보았던 그 미소를 할머니가 다시 보였다. 뿌연 연기로 가득 찼던 고깃집에서와는 달리 한적한 공원에서 다시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부잣집 안방마님으로 보일 만큼, 고상한 품위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절로 풍겨 났다. 껌 파는 할머니들이 실제로는 벤츠 타고 다닌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 시간까지 집에 안 가시고 뭐하세요?”

   “껌을 다 팔아야 집에 가지.”

   그 말에 동규는 할머니의 손 언저리를 훑었다. 종이 상자 속에는 아직도 껌들이 반이 넘게 남았다. 버스는 끊긴 지 오래였고 택시마저 드문 시간이다. 동규는 할머니 걱정이 앞섰다.

   “할머니, 남은 껌, 전부 얼마예요?”

   할머니가 놀란 눈이 되었다.

   “제가 전부 사 드릴게요. 그리고 얼른 집에 가세요. 조금 있으면 추워져요.”

   동규는 주머니를 뒤져서 가지고 있던 지폐를 모두 꺼냈다. 족히 삼만 원은 될 것 같았다. 그것을 모두 할머니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남는 돈으로는 반드시 택시 타고 가세요.”

   할머니가 말없이 동규를 바라보았다. 동규는 할머니가 행여 다른 말이라도 할까 봐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할머니로부터 빼앗듯 껌 상자를 챙겼다. 며칠 동안 양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역시 자네는 참 착한 사람이야.”

   “할머니, 얼른 가세요. 큰길로 나가면 택시가 그래도 있을 거예요.”

   동규는 할머니를 재촉했다.

   “껌을 다 팔아줘서 정말 고마워. 고마워서 어쩌나? 내가 따로 줄 건 없고, 지금은 이것밖에 없네.”

   그러면서 할머니가 동규에게 내민 것은 작은 서류 봉투였다. 동규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할머니를 서두르는 것이 지금은 더 급한 일이다.

   “할머니, 얼른 일어나세요.”

   “총각도 조심해서 들어가.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네네, 할머니도 좋은 일이 많으실 거예요. 매일매일 껌 백통 아니 천통씩 파실 거예요. 그리고 부자 되실 거예요.”

   동규는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할머니를 채근했다.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난 할머니는 역시 느릿느릿 걸음으로 한참 만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규는 할머니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월의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지금은 전화보다 우선 당장 집으로 갈 일이 걱정이었다. 큰길로 나갈 요량이었다. 그때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가까워진 것은 택시였다. 동규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차는 동규 앞에 정확하게 멈추었다. 뒷자리에 앉아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할머니 말씀이 맞네? 여기 가면 장거리 손님이 있을 거라더니.”

   동규는 그 말을 흘려 들었다. 택시를 타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서류 봉투가 그제야 느껴졌다. 봉투를 열었다. 스르륵 미끄러져 나온 것은 한 장씩 뜯어 쓰는 일력日曆이었다. 손바닥 두 개만 한 작은 크기였다.

   ‘할머니가 폐지 수집도 하나 보네. 이 정도면 몇백 원은 받으실 텐데. 어디 보자, 이게 언제 적 달력이야?’

   이미 몇 장이 뜯겨 나간 달력의 고정틀에 2001년이라고 적힌 붉은 글씨가 보였다.

   “뭐야? 올해 것도 아니고 2001년? 할머니가 진짜 휴지를 주셨구나, 쓰레기를 주셨어! 차라리 껌이나 좀 깎아 주실 일이지.’



   모자라는 백 원 대신, 껌 한 통을 주며 양해를 구했더니 택시 기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현관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기운이 동규를 맞았다. 달력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결국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목이 말랐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가 보였다. 뚜껑을 땄다. 주둥이를 입에 대려는데 병이 그만 손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촤아악. 물이 순식간에 바닥에 쏟아졌다. 젠장,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투덜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행주도, 마른걸레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달력이 눈에 띄었다. 옳지. 동규는 달력의 몇 장을 북북 찢었다. 바닥에 엎드려 물을 닦았다. 달력은 걸레보다, 행주보다 금방 물을 빨아들였다. 재활용 쓰레기장을 지날 때, 버리지 않고 가져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마무리를 하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동규는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부모님과 영월의 할머니가 머릿속에서 잠시 맴돌다가 밀려오는 잠에 쫓겨 곧 사라졌다.




   “너, 언제까지 잘 거니?”


   엄마가 동규를 깨우는 말은 항상 그것이었다. 언제까지 잘 거냐고. 그럴 때마다 동규는 이불을 감고 돌면서 항상 똑같은 소리를 했다.

   “오늘은 학교 안 가도 되는 날이에요.”

   십 년 전부터 그것은 잠꼬대를 가장한 혼잣말이 되어 버렸다. 엄마 생각이 나는 아침이면 동규는 묻지도 않은 말에 혼자서 그 말로 답을 되풀이하곤 했다.

   “오늘부터 토익 수업 듣는다며, 벌써 여덟 시야. 빨리 일어나!”

   동규의 미적거림에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역시 그리운 엄마.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꿈이 더 생생하다. 회사에 지각을 하더라도 조금 더 즐기고 싶다. 엄마가 유난히 보고 싶다. 잠을 자고 있는 것임에도, 꿈을 꾸는 중임에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술 좀 작작 먹고 다녀라.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런 거야?”

   엄마는 언제나 저렇게 말하면서 방문을 활짝 열었었다. 등 뒤로 거실의 찬기가 느껴졌다. 동규는 어젯밤 방문을 닫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쏟아진 물을 닦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도 다시 기억났다. 역시 초가을이라 바람이 차구나. 그런데 누군가 동규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이 느껴졌다. 층간 소음인가? 위층 아가씨는 새벽에 들어와서 지금은 자고 있을 건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동규는 슬며시 눈을 떴다. 아침은 아침이다. 그런데 이불이, 이불이 이상했다. 내가 왜 이것을 덮고 있지? 지난달 백화점에서 산 양모 이불이 아니었다. 잠결에 다른 이불을 꺼내 덮었나? 하지만 다른 것이 있을 리 없잖아? 부모님의 장례를 마치고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모두 버렸잖아?

   역시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안 되겠다. 빨리 일어나 씻고 출근하자. 갑자기 김 과장의 성난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야! 이 녀석, 이거 도저히 안 되겠네? 너 빨리 안 일어나?”

   김 과장이 내 이불을 와락 벗겼다.

   “죄, 죄송합니다. 과장님.”

   이불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어쩌면 또 손이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천천히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천장은, 그리고 이 벽지는.

   “김 과장이라니, 그건 또 무슨 신종 잠꼬대니? 소영이가 아침부터 집으로 전화했더라. 너랑 학원 가기로 했는데 휴대폰도 안 받는다고. 걔는 대체 네가 뭐가 좋아서 그러는지 원.”


   엄마. 동규의 눈앞에 엄마가 서 있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동규를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 이건 꿈이 아니다.

   “어, 엄마…”

   “그래, 네 엄마다. 화상을 낳은 죄 많은 여인, 박 경숙 여사다. 빨리 안 일어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박 부장과 술을 마시고, 토했고, 껌 장사 할머니를 만났고, 택시를 탔고, 집으로 왔고, 물을 쏟았고, 그것을 닦았고, 그리고 잠이 들었고. 동규는 박 부장에게서 들은 것이 생각났다. 이로 혀를 꽉 깨물고 뺨을 꼬집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속으로 천천히 헤아렸다. 깨지 않아도 좋을 꿈이지만 지금은 어쨌거나 출근을 해야 합니다. 엄마, 미안해요. 동규는 한쪽 눈부터 천천히 떴다.

짜악. 정수리가 얼얼했다. 김 과장이 올려붙이는 뺨과 다름없었다. 엄마가 한 팔을 쳐든 채였다.

   “너 자꾸 그러면 아빠 부른다?”

   아니, 아빠도 계신 거예요? 동규는 스프링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엄마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얼른 팔을 뻗어 엄마를 잡았다. 부드러운 엄마의 살결이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다.'


   “엄마.”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지없이 좋은 엄마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아니, 애가 왜 이래? 징그럽게?”

   그러면서도 엄마는 동규가 껴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저게 무슨 일이냐?”

   동규는 문을 박차고 마루로 달려 나갔다. 아빠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탄식을 하고 있었다. 아빠, 무사하셨군요! 마찬가지로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동규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어느 빌딩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건물이었다. 상기된 얼굴의 기자의 뒤로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며 폭발하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저 때려죽일 놈들.”

   “아빠, 오늘이 며칠이에요?”

   “오늘? 모르겠는데? 달력 봐라.”

   달력이라는 말에 동규의 머리를 얼핏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불을 개키던 엄마가 무슨 호들갑이냐며 동규를 다시 나무랐다.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어쩌면 설마.

   책상 끄트머리에 조그만 종이뭉치가 놓여 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정신없이 펄럭이는 그것은, 달력이다. 어젯밤에 물을 닦고 던져둔 그대로였다.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휘날리는 달력을 조심스럽게 잡고 눌렀다. 찍혀 있는 날짜가 선명했다. 9월 11일, 화요일, 2001년.

   “엄마, 오늘이 구월 십일일이예요?”

   “그래. 왜?”

   여전히 놀란 눈으로 엄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오늘 영월 가실 거예요? 할머니 만나러?”

   “그래. 그런데 왜?”

   “아, 안돼요, 절대 안 돼요.”

   “할머니 생신이잖니. 오래전부터 정한 일정이야. 너는 소영이랑 선약 있어서 못 간다며? 할머니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놈이 여자 친구 생기더니 완전히 그냥…”

   “안 된다구요, 절대로, 절대로 오늘, 영월에 가서는 안 된다구요!”


   동규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터져 나왔다. 엄마가 놀란 눈으로 동규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달력은 여전히 책상 위에서 펄럭거렸다. 오늘은 이천일년 구월 십일일, 달력의 뒷장이 백지인 것은 그때까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Image by MaeM from Pixabay 

* 지난 번 매거진의 글 '옛이야기"를 읽고 많은 분들이 염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새 글로 대체하여 발행합니다. 읽으셨던 분들과 댓글을 주셨던 모든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아울러 드립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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