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보다 몇 해 앞서 고향을 떠난 큰아버지는 부산에 정착한 직후부터 집 장사를 시작했다. 땅을 가진 사람을 설득해서 집을 짓고, 그렇게 지은 집을 당신이 직접 팔았다. 공인중개사라는 말은 고사하고 복덕방조차 쉽게 찾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거래 성사는 힘들었으나 건축과 매매, 양쪽 모두에서 이익을 볼 수 있으니 제대로 임자를 만나기만 하면 꽤나 큰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우선 과제가 있었다. 완공에 때를 맞추어 사람이 살게 해야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아무리 잘 지은 새 집이라 하더라도 텅 비어 있으면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시기의 징크스였다. 사람이 들어와 제대로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집을 사겠다는 말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엌 하나 겨우 딸린 단칸방을 전전했던 우리 가족이, 졸지에 번듯하고 화려한 이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은 모두 그런 연유에서였다. ‘집이 팔릴 때까지 너희 가족이 들어가서 살아라.’ 명령에 가까운 큰아버지의 부탁을 아버지는 처음부터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사정이었을 뿐, 하루아침에 으리으리한 이층 집으로 옮겨 살게 된 나는 그저 신나고 마냥 즐거웠다.
‘와아, 이제 우리도 부자가 되었구나.’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다 잠들 만큼 좋았던 그 몇 해를 일러 지금도 나는 이층집 시절이라고 부른다. 눈부시게 화려한 시절, 그때 내 나이 일곱 살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참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행주치마에 손을 닦는 엄마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와앙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니 또 왜 우노? 누구한테 맞았나?”
물코를 들이마시며 가해자의 이름을 겨우 말하려는데 엄마가 먼저 짚었다.
“또 화영이가 때리더나?”
나는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 진범을 알렸으니 이젠 엄마의 손을 잡고 화영이 집으로 쳐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면서 대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만 울어라, 쫌!”
안 된다. 여기서 울음을 멈추면 엄마의 마음이 변해서 화영이에 대한 응징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나는 더 악을 썼다. 엄마는 우는 나를 달랠 생각은 않고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쪽 눈으로 엄마를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더 큰 소리로 생울음을 짜냈다. 한참 만에 엄마는 짧은 한숨과 함께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니, 자꾸 울면, 화영이한테 장가보낸다?”
헉. 그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이제 막 입술에 닿을락 말락 했던 콧물이 전속력을 다해 제 자리로 돌아갔다. 눈물도 뒤처지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장가라니, 세상에, 화영이에게 장가라니.
그날도 역시 구슬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바닥에 흩어진 것들만 따면 내가 또다시 판을 쓸어버리는 상황이었다. 실눈을 뜨고 한껏 과녁을 견주었다. 그때 갑자기 내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바람에 제대로 던졌구나 싶었던 구슬은 결국 빗나가 버렸다.
“에이씨, 머꼬?”
부아가 나서 볼에 바람부터 넣었다. 방해꾼에게 제대로 따질 심사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그녀가 서 있었다. 대략 가늠으로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만만찮은 어깨는 족히 두 뼘 이상 넓었다. 나란히 서기라도 하면 그녀의 그림자 속에 내 몸이 완전히 가려질 판이었다. 그녀가 바로 그 골목의 지배자, 화영이었다.
“우리 집 앞에서 놀지 마라.”
“니가 뭔데. 여기가 전부 너거 땅이가?”
나는 차라리 그 말을 안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엄마로부터 바보라며 핀잔을 듣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화영이에게 장가보낸다는 무시무시한 겁박을 들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과 나란한 담장 너머에 화영이네가 살았다. 이층에 올라가면 그 집 마당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날의 기습을 계기로 화영이의 출몰이 잦아졌다. 어떻게 아는 건지 내가 자기네 대문 앞을 지나기라도 하면 문을 벌컥 열어서 놀라게 만들고, 더없이 운수가 좋은 날에 딱지와 구슬을 휩쓸기라도 하면 역시나 그 결정적인 순간에 화영이가 꼭 나타났다. 그리고는 아무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나를 밀치거나 이상한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어 우악스럽게 나를 때렸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화영이네 깜장 대문이 끼이익 열리는 시늉을 하면, 나는 응당 챙겨야 할 구슬과 딱지는 진작에 팽개치고 집을 향해 죽기 살기로 달음박질을 치곤 했다.
유일한 내 편이라고 믿었던 엄마는 이사한 지 며칠 만에 화영이 엄마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연산동 히틀러인 누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화영이에게는 고등학교 다니는 큰오빠, 중학교 다니는 작은오빠, 국민학교 다니는 언니까지 그야말로 히틀러를 능가하는 막강 부대가 뒤를 받치고 있었다.
공포의 집에 상주하는 귀신처럼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와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저런 화영이에게 심지어 장가를 가라고? 장가가 뭔지 자세히는 몰라도 같이 산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이듬해 봄,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엄마를 의식해서였는지 나는 한껏 의젓한 척을 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교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만치 뒷자리에 화영이가 시익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 년 전이었다면 바지에 지리고도 남았을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학교 생활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화영이의 시선이 늘 내 등에 꽂혔기 때문이다. 선생님에게 일러버리면 혹시 다른 반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가면 화영이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니까, 큰맘 먹고 아버지를 졸라볼까? 하지만 모든 것은 내 상상에만 그쳤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 댈 만한 일을 화영이가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내가 화영이의 신세를 지는 일이 자주 생겼다. 지금과 달리 작은 체구에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초등학교 일 학년 때에도 자주 골골거렸다. 조퇴를 하면 누나에게 혼이 났기 때문에 사교시를 마칠 때까지 억지로 참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다리가 휘청거려 제대로 걸을 힘조차 없었다. 그때마다 화영이가 나타났다. 빼앗다시피 내 가방을 가져간 화영이는 그것을 앞으로 메고 말없이 내 뒤에서 걸었다. 힘겨운 걸음으로 겨우 집에 도착하면 화영이는 내 가방을 엄마에게 전하고 인사를 꾸벅 한 다음에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이미 화영이가 우리 대문을 나선 다음이었다. 그 해에만 그런 일이 두어 번 더 있었다.
화영이는 삼 학년 때와 육 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유별나게 반가운 척도, 그렇다고 일부러 척을 지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반 친구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각자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동네에서 서로 마주치는 횟수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몇 년 뒤에 우리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화영이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을 찾는 것이 유행하던 때에도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화영이가 부산 모임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굳이 전화번호를 묻거나 근황을 챙기지는 않았다.
계획에 없던 일정으로 부산에서 생활한 지도 두어 달 즈음 지났을 때였다. 아침 산책 길에 뜬금없이 그 이층 집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사는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편한 걸음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이 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라며 비탈길을 돋우어 아버지가 만들었던 계단도 그대로였다. 넝마주이 아저씨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새우던 공터, 누나와 함께 병아리를 묻었던 양지바른 구석, 그리고 화려한 시절의 배경이 되었던 이층 집이 있던 자리엔 어느새 키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것이 있었다. 화영이 집이었다.
검은 대문도 그대로였다. 요즘은 보기 힘든 문패마저 변함없었다. 하지만 박朴이 아닌 김金이었다. 실망은 아니었으나 약간의 허전함이 느껴졌다.
문패가 달린 기둥을 쓰윽 한 번 만져보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끼이익 소리가 났다. 사십여 년 전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열린 대문으로 누군가가 나왔다. 세상에나... 그는, 내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내 색시가 되었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