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운명이라며 처음 만난 지 여섯 시간 만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날 우리가 서로에게 불만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맥주 통이 두어 번 다시 채워지고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었다 싶었을 즈음, 상대에게 바라는 것을 말해 보자고 아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싶어 내심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의 아내는 솔직했고, 또 직선적이었다.
어쨌거나 제안을 받았으니 답을 해야 했다. 잠시 생각한 다음, 내가 말했다.
“오늘은 첫날이라서 이해하지만, 다음에는 귀와 코의 피어싱을 모두 뺐으면 좋겠어요.”
“피어싱? 응, 알았어요.”
귀에 줄줄이 박힌 무시무시한 쇠붙이들을 슬쩍 만지며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다. 예상치 못한 시원시원한 답변에 조금 놀랐지만 속으로는 기뻤다.
이제는 아내가 말할 차례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오빠는 내일부터 옷, 그렇게 입고 나오지 마세요.”
응? 옷? 대답 대신 나는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티셔츠에 캐주얼 재킷, 청바지와 색을 맞춘 구두. 왜? 이게 어때서, 멋지지 않나? 며칠 전에 만난 명수도 내게 그랬다. “와, 진우 니, 서울 사람 다 됐네. 옷빨 쥑이네.”
그런 극찬까지 받은 ‘패션’을 당장 내일부터 입지 말라니. 약간의 화를 섞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 옷차림에 무슨 문제라도?”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내는 대답 대신, 같이 갈 데가 있다며 나를 잡아 일으켰다. 여전히 꽤 많이 남은 맥주가 아까웠다.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동대문에 있는 대형 의류 매장이었다. 늦은 시각, 아내가 나를 데리고 거기로 온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했고 뒷날 등골 브레이커라고 불리는 시커먼 패딩으로 떼돈을 벌게 될 회사의 패션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아내에게, 나의 옷차림이란 - 후일 듣게 된 설명으로는 촌스러움의 극치, 또는 시골 영감 서울 구경 -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제 아무리 앙드레 명수가 극찬을 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패션’, ‘디자인’, 그리고 ‘코디’에 대해서만큼은 아내는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아내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꼴이 되었다. 나로선 난생처음 가 보는 그곳을 아내는 손금 보듯 척척 휘젓고 다녔다. 구석구석 층층이 가게마다 불쑥불쑥 들어서서는, 이걸 입어 봐라, 그건 벗어라, 저걸 입어라, 아니다, 이걸 입어라, 다시 벗어라, 또 입어라, 아니다, 저게 좋겠다, 이젠 이걸 걸쳐라, 저걸 메라. 그러는 사이, 두어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마침내 짜증이 솟구쳤다.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이게 무슨 꼴이람?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의 세레나데가 둥둥둥 동네북을 쳐대고 있었다. 자정이 되지 않았다면 몇 시간 만이었을 테고, 자정을 넘겼다면 하루 만에 헤어진 커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휴, 겨우 끝났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아내가 활짝 웃었을 때, 내 두 손에는 내 방보다 더 큰 쇼핑 가방 서너 개가 들려 있었다. 아내를 태운 택시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개 발에 편자
[속담] 옷차림이나 지닌 물건 따위가 제격에 맞지 아니하여 어울리지 않음을 이르는 말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사 주는 대로 받아오기는 했지만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맞춰 입어야 할지 전혀 ‘대책’이 서질 않았다. 하나의 상의上衣와 하나의 하의下衣, 아마도 그것은 천국으로 직행하는 옷차림일 게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는 지옥의 일상복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어쩌다 아내가 집으로 찾아와 같이 외출하게 될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챙겨주는 대로 입기만 하면 되니, 이른바 ‘코디’라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혼자서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대부분의 날들에는 아침마다 난감한 일이 되풀이되었다.
아내가 알려주는 순서대로 옷을 메모하기도 하고, 나중엔 사진을 찍어두고 그걸 보며 맞춰 입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챙겨 입는다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다.
할 수 없이 나는 원래의 옷을 다시 꺼내 입기 시작했고, 아내가 정성 들여 옷을 챙겨준 날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쁘레따 뽀르떼'가 아닌 '아라따 돼따'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퇴근 후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코디가 맞지 않더라도 아내가 사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늘어진 티셔츠에 후줄근한 재킷, 무릎이 살짝 밀려 나온 청바지와 먼지가 잔뜩 묻은 구두. 그걸 보자마자 아내는 강남역 십 번 출구 앞에서 선 채로 그만 울어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저 거지는 왜 지나가는 여자를 울리는 걸까? 아마도 그런 눈빛이었던 것 같다. 이유를 막론하고 아내부터 달래야 했다. 서둘러 커피숍으로 들어가 우선 보이는 자리에 앉혔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평소엔 잘 입고 다닌다, 오늘은 바빠서 그랬다, 용서해라. 한참의 사죄 끝에 아내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 맞죠?”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나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크게 끄덕거렸다. 눈물을 찍어낸 아내가 다시 말했다.
“종이에 써 줘요.”
“뭘요?”
“잘못했다고, 무엇 무엇을 잘못했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써 줘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쳐도 나이 서른 하나 먹고 커피숍에 앉아서 여자 친구에게 줄 반성문을 쓰라니. 고교 시절 종덕이 녀석 때문에 경찰서로 끌려갔던 뒤로 반성문이라는 말은 듣기조차 처음이었다. 난감했다.
아내가 울먹이며 설명을 덧대었다. 말로만 사과하고 끝내면 다음에 또 그럴 것이고, 그런 적 없다며 나중엔 사과와 반성을 번복할 수도 있으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반성문을 써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굴도 못 뵌 장인어른은 어쩌자고 그런 것까지 가르치셨을까.
내가 미적거리자 아내는 다시 울 채비를 했다.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연애 중이라는 말을 마음 속으로 백 번은 더 되새겼던 것 같다. 나중에 두고 보자는 다짐조차 혀 밑에 숨겼다. 커피숍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이와 볼펜을 겨우 빌려왔다. 아내가 바라는 대로 구구절절 적어 내려갔다. 글이라면 그때도 자신 있었다. 자랑이다. 맺음말은 역시 아내가 시키는 대로 썼다.
내가 잘못했다
그것이 바로 이십 년의 결혼 생활 동안 열 번도 넘게 반복된, 반성문 인생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일찍 귀가하겠습니다,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집안일을 함께 하겠습니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겠습니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재기하겠습니다,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겠습니다...
똑같은 내용으로 두 번의 반성문을 쓴 적도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또 한 번 썼다.
아내의 말을 빌자면 분당과 부산으로 떨어져 지내고 있음에도 내가 반성할 일은 차고 넘친단다. 가장 최근에 썼던 '죄명'은 ‘자주 전화를 하겠다’였고 맺음말은 역시나 변함없이 ‘내가 잘못했다’였다. 하지만 이번엔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 많았다. 자기가 전화를 걸면 되지, 왜 매번 내가 먼저 해야 되나 싶어서 은근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진으로 찍어 보낸 다음, 곰곰이 보고 있다가 마침내 틈새를 찾아냈다. 그리고 슬쩍 글자 하나를 덧붙여 보았다. 그걸 보니 금방 흐뭇해졌다.
아내가 잘못했다
'아' 한 글자면 충분했다. 언제까지 나만 잘못할 줄 알아? 혹시나 들키면? 상관없다. 재빨리 쉼표 하나만 찍으면 된다. 이렇게 말이다.
아내가 아,내가
이십 년 년 동안 아내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적어온 반성문은 오직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정말 다른 뜻은 전혀 없다. 웬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나는 원래 아주 억센 남편이며 무지하게 강한 남자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니까, 진짜라니까. 쩝 아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