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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Dec 09. 2021

착한 징크스

님아, 제발 그 물건 떨어뜨리지 마오


‘괜찮을까?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수십 번도 넘게 머리를 흔들었던 것 같다.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부릉.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가속 페달을 밟은 발가락 끝으로 전에 없던 긴장감이 전해졌다. 큰길로 접어들었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래, 별일 없을 거야. 그건 그냥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며 천천히 앞차를 따라갔다.

어느새 정자동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꼬리물기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길게 늘어선 행렬 맨 끝에 내 차가 멈추게 되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본능적으로 뒷거울을 보았다. 아니, 그런데, 저거, 저기 달려오는, 저건 뭐야. 야! 속도 줄여야지? 야, 야 임마, 그렇게 달려오면, 어, 어, 어? 박는다, 박는다, 이런 젠장. 콰아아앙!

아찔했다. 곧 정신을 차렸다. 겨우 문을 열고 힘겹게 내렸다. 삼중 추돌 사고였다. 이제야 잠에서 깬 것 같은 사고 운전자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트렁크 덮개를 보는 순간 내 얼굴도 찌그러졌다.

보험사에 연락해야 된다는 생각보다 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재킷을 빼내려다 실수로 옷걸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었다. 그걸 보고서도 차를 끌고 나오다니.


그랬다. 아침에 물건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징크스였다.


징크스 Jinx

본래 의미는 불길한 징후, 불운 등을 뜻한다. 통상적으로는 "꼭 이 일만 하면 일이 제대로 안 풀린다", "이건 꼭 이렇게 되더라"는 관념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출처 : 나무위키)


나의 징크스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기[터부 taboo]를 깬 아버지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거라는 엄마의 한탄에서부터, 이후 성인이 되기까지 크고 작은 징크스는 내 삶 전반에 차고 넘쳤다.

친구들과 구슬 따먹기를 할 때, 해를 등지고 앉으면 꼭 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책받침이 징크스가 되었다. 실수로 공책 두 장을 겹쳐 받치게 되면 반드시 누나에게 혼나는 일이 생겼다. 중학교 때는 택시 징크스가 발동했다. 시험날 아침 등교하던 중에 노란 택시를 보게 되면 여지없이 시험을 망쳤다. 나중에는 땅만 보며 학교까지 걸었다. 고등학교 때는 뜬금없이 묵언默言 징크스가 머리를 내밀었다. 아침 자습 시간에 말을 하면, 그날은 어김없이 선생님에게서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전혀 알 리 없는 학기 초의 친구들은, 자기를 무시하는 거냐며 사소한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다. 물론 그때조차 나는 입을 닫고 있었지만.


물건을 떨어뜨리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징크스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것이었다. 신입 사원 시절, 선배인 양대리에게 처음으로 뺨을 맞은 것도, 진급 시험에서 누락되던 날도, 비상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르게 된 일도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날들의 아침에는 어김없이 면도기나 칫솔, 셔츠, 또는 그 무엇이 되었든 꼭 한 가지는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런 징크스가 더욱 심각한 문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아내와 결혼한 직후의 일이다.




보고 싶어 하던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출연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온다는 소식에 아내는 며칠 전부터 신이 났다. 전국 노래자랑 주제가가 일요일의 기상 음악이었으나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나까지 서둘렀다.

“분당에서 왕십리까지는 대략 사십 분 정도 걸리니까, 몇 시쯤 출발하면 될 것이고…”

아내는 화장을 하며 혼잣말처럼 시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간만의 데이트여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아내가 미리 지정해 둔 옷을 꺼내 입기만 하면, 오늘도 패션 피플 소리를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먼저 셔츠와 바지를 잘 입고 나서 이제 재킷을 옷걸이에서 빼낼 차례였다. 살짝, 조심조심. 그런데 털썩, 어머나. 잠시 후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빈 옷걸이였고, 재킷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아뿔싸, 맞다, 징크스. 아내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 황 여사…”

“응, 오빠? 왜?”

천진난만한 얼굴로 아내가 돌아보았다.

“그게 있잖아, 저, 있잖아. 황 여사, 우리, 차 두고 지하철, 타고 가면… 안 될까?”


결국 그날 우리는 왕십리往十里는커녕 왕오리往五里도 하지 못했다. 지하철로는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춘다는 아내의 말에, 그럼 택시를 타고 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내가 제안했다. 하지만 먹힐 리 없었다. 차라리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아내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최근 연달아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에는 공통적으로 나의 징크스가 있었음을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아내는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날 오후, 우리는 각자의 방에 틀어박힌 채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와는 달리 아내는 지극히 현명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내는, 의미 없는 냉전冷戰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더니 아내가 작은 상자를 내 앞으로 밀었다. 아직까지 편한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이게 뭐냐며 눈으로 물었다. 궁금하면 직접 열어 보라는 대답을 아내가 했다. 마찬가지로 눈짓이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그 안에는 작은 반지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내의 눈이 한 번 더 말했다. ‘맞는지 껴 봐.’ 손가락에 꼭 맞았다. 머리는 그렇지 않은데 방정맞은 입이 그간 지켜온 침묵의 의리를 져버렸다.

“반지는 왜?”


아내의 설명은 간단했다. 징크스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니, 앞으로는 이 반지 하나로 모든 징크스를 대신하라는 것이었다. 즉, 이 반지를 끼고 다니기만 하면 나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도 않으며, 좋은 일들만 계속 있을 것이라는 부언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참 단순한 인간. 나는 그날부터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지 않았다.


황여사의 정령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절대 반지. 빼면 죽음.


요즘에는 새로운 징크스가 생겼다. 그것은 아침 기도다.

공식적으로는 아내를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나의 종교는 기불천교, 즉 기독교, 불교, 천주교의 삼교三敎 연합교다.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교리는 사랑이며 그것은 언제나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올초부터 매일 어김없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하느님, 부처님, 성모님의 손을 맞잡고 기도를 드린다.

내용은 별 것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할 일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을 꿈꾸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원의 기도가 이어진다. 우리 가족, 친구, 지인들 모두 각자 뜻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최근의 기도 중에는 그전보다 기억하는 이름이 많이 늘었다.

언제나 좋은 글로 가르침을 주시는 발검 스승님,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전해주시는 최형식 선생님, 육아 일기 연재에 여념이 없는 블루 애틱 작가님, 환경이 열악한 인도에서 고군분투하시는 호호 아빠님, 열정적인 집필 활동 중에 관절 수술을 받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계신 로운 작가님, 그리고 작당모의 작가님들 네 분을 포함해서 내가 구독하는 오십여 분의 글 친구님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소리를 내서 이름을 부른다. 내가 구독 작가를 쉽게 늘리지 못하는 이유가 사실 여기에 있다. 오십 명 넘어가면 은근히 빡세다. 험험.


아침 기도를 대충 하거나 거르기라도 하면, 그날은 여지없이 진상 손님 또는 손님을 가장한 짐승을 만나게 된다.

 



아내가 엊저녁에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뜬금없이 아내가 반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착용하고 있는 내 반지가 너무 오래되었으니 새 걸로 바꿔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새 반지까지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새 것을 마다하는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최근에 새로 생긴 징크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다 듣고 난 아내는, 이번에야말로 참 좋은 징크스, 착한 징크스를 가졌다며 칭찬을 했다. 오십이 되었어도 칭찬은 언제나 즐겁다.


웃으면서 통화를 이어 가던 중에 무심코 내 손가락을 보았다. 앗, 그런데, 반지가 없다. 큰일이다. 아뿔싸, 세수를 하면서 잠시 빼둔 모양이다. 서둘러 전화를 끊자고 하니 무슨 일이냐고 아내가 묻는다. 어쨌거나 빨리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건 징크스 때문이 아니다. 그냥 습관이니까, 늘 끼던 것이 버릇이니까, 그냥 그래서 그렇다. 절대로 그놈의 징크스 때문은 아닌 거다. 진짜다.




Image by MiraCosic from Pixabay



진우가 추천하는 12월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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