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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Dec 01. 2021

자기 속에서

자기소개서의 다른 이름입니다


1기 수료생 열 다섯 명 모두가 호텔 취업에 성공하는 과정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2기들은 교육 이주차로 접어들면서부터 수업 태도가 싹 달라졌다. 공부와 학습에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학생이 설령 결석을 한다 해도 딱히 나무라지는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해서 지각은커녕 수업 중에 잠시 엎드려 조는 사람마저 완전히 없어졌다는 사실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커리큘럼은 솔직히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전체 36일의 일정 동안 135개의 세부 항목으로 나눠진 호텔 실무 기초 과정을 빠짐없이 학습해야 한다. 매일 저녁 여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컨시어지 Concierge, 연회 Banquet, 당직 On duty, 식음료 Food & Beverage, 호텔리어 기본 서비스 등의 주요 분야를 배우고 익히면서, 또 수시로 평가를 받는 과정이 이어진다.

커피숍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어디 한 번 가볼까 식으로 설렁설렁 나들이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각자의 직장이나 부업의 현장에서 일을 하고 피곤이 쌓인 저녁 시간을 할애해 수업에 참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로에 찌든 그들의 얼굴을 보면 짠하기도 하고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격려와 독려, 그리고 잘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확인하게 된 선배들의 연이은 합격 소식은, 호텔 취업에 대한 간절함에 전에 없던 열의까지 함께 실어준 것 같았다. 변화된 그들의 모습에 더욱 고무된 것은 역시 나 자신이었다. 강의 준비를 나름 충실히 했음에도 무언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1기 때보다 더 많은 학습 자료와 참고 서적을 미리부터 챙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음에 걸리는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소개서였다.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기입하는 것만으로도 이력서 작성은 충분하니 그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성장 과정, 성격의 장단점, 주요 학력 및 경력, 지원동기와 포부 등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서술해야 하는 자기소개서는, 전체 과정을 통틀어서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시험 아닌 시험이다. 또한 이것은 서류뿐만 아니라 면접관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발표 준비까지 병행해야 하니 학생들이 실제로 느끼는 부담은 더욱 크다.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완성하느라 1기들 역시 교육 수료를 불과 며칠 앞두고 다들 진땀깨나 흘렸었다. 그때 얻은 교훈이 있어서 이번 기수부터는 자기소개서 과정을 미리 커리큘럼의 초반으로 당겨서 편성해 두었다.




소개서를 작성하는 첫날이었다.

대략의 개요를 알려주고 첫 단락인 성장 과정의 초안을 자유롭게 써 보라고 했다. 대략 삼십 분이 지난 다음, 학생들이 쓴 것을 확인해 볼 참이었다.

제일 앞에 앉은 학생의 것을 받아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순백純白의 A4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열 다섯 중에 반이 넘는 수가 한 줄도 쓰지 못했고 두 명은 ‘저는 몇 년도에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셋은 ‘자상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를 이력서 대문 아래 세워두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학생들이 합창하듯 내게 말했다.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써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남도 아닌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게 뭐가 어려우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쉽고 어려움에 대한 각자의 기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하물며 글과 말을 통한 것이다. 일장연설을 하는 대신 나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마음을 다잡고 학생들을 하나씩 앞으로 불러냈다.


그날로부터 매일 한 시간씩을 할애해서 열다섯 명의 수강생 모두는 자기의 소개서를 다듬었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첨삭했다. 매주 금요일이면 학생들이 그 주에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모은 다음, 집으로 가져와 주말 동안 글자를 고치고 문장을 다듬었다. 월요일 수업 시간에 자기의 것을 돌려받은 학생들은 소리 내서 읽거나 다시 수정을 하고 고친 다음 외우기를 반복했다. 그런 일정이 사 주 동안 꼬박 계속되었다.




마지막 점검을 하는 날이 되었다.

첫 발표자가 테이프를 잘 끊은 탓에 모의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별한 지적 사항 없이 서너 명이 자기 차례를 마쳤고 다음은 민태 군의 차례였다.


교단 앞으로 나온 민태 군이 제대로 자세를 갖추고 심호흡부터 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의 눈이 민태 군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음에도 시작이 조금 늦어진다 싶은데 민태 군이 갑자기 교탁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설마 못 외워서 저러는 건 아닐 테고.

그동안 낯이 익고 정이 들어서 이미 호형호제를 하는 동기 몇이 민태 군을 달래려고 일어설 폼을 잡았다. 나는 손짓으로, 그냥 놔두라고 했다.

어깨를 들썩여가며 한참을 울던 민태 군이 잠시 후, 여학생이 살짝 건넨 휴지로 눈 언저리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곧 민태 군이 말을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처음입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준비도 잘했고, 여러분들 도움으로 암기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혼자 몸으로 평생 동안 저를 키우신 어머니 생각을 하니 뜬금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번에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면서 성장 과정을 적는 내내, 어머니 얼굴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못난 모습을 보여 정말 죄송합니다.”

민태 군이 꾸벅 인사를 하자 동기들은 교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다. 민태 군은 그제야 진정이 된 듯,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막힘 없이 자기소개를 잘 마쳤다. 내용도 좋았다.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간 나 역시 말꼬리가 흐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태의 눈물이 다시 생각났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민태 역시 이십 중반이 되는 동안,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제대로 돌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소개서 초안을 쓸 때도 항상 어머니 이야기 대목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던 민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속속들이 자세한 사정이야 내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다들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리하며 반성할 기회가 된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다.


이것은 다른 학생의 자기소개서입니다


어제부터 2기 수강생들의 호텔 면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민태 군과 다른 세 명은,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부산의 특급 호텔 프런트 파트에 지원했다.

오후 세 시로 예정된 면접을 마치고 저녁 수업에 참석한 민태 군과 일행은 면접 때 입었던 양복 차림 그대로였다. 모두들 생애 첫 호텔 면접의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치 난생처음 서울 구경을 다녀온 촌놈들의 자랑 각축장에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나도 밉지 않았다.

한참 이야기 중이던 민태 군이 나를 보며 한마디를 했다.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말이 마음에 울린다.




우리 학생들은 이제 각자 대여섯 곳의 호텔 면접을 진행한 다음, 합격한 호텔들을 대상으로 검토와 상의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한 군데를 정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다른 학생들도 호텔들로부터 통보를 받고 면접에 참여한다.


면접관들에게 부탁드린다. 우리 학생들이 준비한 자기소개서는 민태 군의 말대로 자기 속에서 우러난, 거짓 없이 진실된 것이다. 그러니 부디 한마디도, 한 구절도 건성으로 듣지 마시고 마음을 열고 잘 들어주십사, 다시 한번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설령 그 결과가 아쉽지만 불합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자기소개서는 자기 속에서 우러나는 이야기입니다



* 12월 1일 저녁 23시에 덧대는 문장 : 여러분들의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네 명의 학생들은 모두 합격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최종 합격 통보를 연락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임. 가르치는 재미와 보람 때문에 12월 중순에 시작될 4기 강의 계약서에다 덜컥 서명을 해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황여사에게 반성문을 또 써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마음 가는 대로 휘리릭이다. 설마 죽이...)



Image by Yonhap News



진우가 추천하는 12월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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