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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Dec 03. 2021

은행 달력

그것도 무조건 부산 은행


늦은 오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라면 문자 메시지가 전부인 엄마에게서 직접 전화가 걸려 왔으니 우선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첫마디는 언제나 똑같다.

“바쁜데 내가 전화한 건 아니제?”

입 모양으로 소리를 따라 해도 될 만큼 익숙해진 엄마의 상용구常用에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저쪽으로 건너갔나 보다. 살짝 웃더니 엄마는 다음 말을 곧 덧붙였다.

“혹시 호텔 근처에 부산 은행이 있나?”

“네? 부산 은행요?”


은행을 찾는 경우라면 당연히 현금 인출 아니면 입금이나 송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집에서 오십여 미터 거리에 부산 은행이 떡 하니 있는데 엄마가 굳이 내게 전화를 걸어가면서까지 그 은행을 찾는 이유를 금방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혹시 다리가 아파서 은행까지 걸어가기 힘들어 그러시나?

“엄마, 현금 필요하세요? 돈 드릴까요? 아니면 송금할 일이 있어요?”

“아니고, 그게 아니고….”


알고 보니 엄마가 말끝을 흐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가 부산 은행을 찾는 것, 그것은 바로 달력 때문이었다.

엄마 연배의 할머니들 사이에 오랜 속설이 하나 있었던 거다. 은행 달력을 걸어두면 집에 돈이 들어오고 가족이 건강해진단다. 여러 금융 기관 중에서도 부산 은행의 축원祝願 능력이 가장 뛰어나단다.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엄마 역시 몇년째 그 신통력을 신봉하고 있었다.

올해는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없어 궁금해 하던 차에, 엄마와 함께 복지관 봉사 활동을 하는 다른 아주머니가 자신은 이미 며칠 전에 달력을 받았다며 서둘러 가보라는 말을 하길래 뒤늦게 은행 문을 열었지만 남은 달력은 아뿔싸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엄마의 설명을 듣다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오호, 이런. 실로 대단하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썰設을 만들어 널리 전파한 직원을 찾아내서 당장 큰 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았다. 매년 11월 11일에 일 년 매출의 절반을 기록한다는 작대기 초콜릿 회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돈을 받고 파는 것은 아니지만, 먹으면 사라지는 과자와 달리 일 년 내내 벽에 걸린 채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달력이야말로 풀 세일즈 프로모션 Pull Sales Promotion의 끝판왕인 것이다.


“케이비 KB나 에스씨 SC 달력은 안됩니까?”

“안 된다. 무조건 부산 은행이다. 농협도, (새)마을금고도 절대 안 된데이, 알겠제?”


서둘러 업무를 정리하고 근처의 부산 은행을 찾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의 말이 맞았다.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난처해하면서도 기쁜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는 부산 은행 창구의 여직원이 말했다.

“그러게요, 직원들도 저희 달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본사에서 좀 더 만들어 보내준다는데, 달력이 배부되는 걸 어떻게 아시는지 어르신들이 그날이면 새벽부터 줄을 서 계실 정도예요.”


두어 군데를 더 들렀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결국 아무개 지점의 부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대학 동기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진우 네 얼굴 보려면 달력으로 꼬셔야 되는구나?”

지금 당장은 갖고 있는 게 없지만, 며칠 후에 새 달력이 도착하면 바로 연락하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엄마에게도 잠시만 기다리면 달력을 곧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엄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이고, 참말로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점심은 먹었나?”

시각은 이미 오후 여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두 분의 방엔 이미 불이 꺼졌다. 생각난 김에 집 안을 돌아보았다.

거실에는 과연 부산 은행 달력이 올해의 마지막 장을 널어 뜨리고 있고, 주방 벽에는 인근에 있는 절 달력이 인사를 한다. 엄마가 아침 기도를 하는 작은 방 책상 위에는 탁상용 달력이 놓였다. 당연히 부산 은행이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든 엄마에게 ‘돈’과 ‘건강’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고난의 시절과 역경의 순간을 온몸으로 오롯이 버텨내고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리면서, 그래도 바라는 것이 남았다면 그것은 오직 자식들의 평안. 그것을 향한 기도만이 유일하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라고 믿는, 지금은 바로 엄마의 시간. 그 시간을 가득 채운, 한 순간도 변하지 않는 우리 엄마의 구복求福이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젠 국화꽃보다 저승꽃이 더 예쁘다며 구박받을 농담을 슬슬 꺼내는 엄마의 잠든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본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엄마가 잠에서 깼다. 쉽게 떠지지 않는 엄마의 눈에 반가움이 먼저 다녀간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내게 묻는다.

“밥 묵었나? 배 안 고프나?”

엄마의 뺨에 살짝 손을 갖다 대며 계속 주무시라고 다독였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서 잠시 멈추어 섰다. 벽에 걸린 달력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손으로 달력을 쓰윽 한 번 쓰다듬은 다음,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부산 은행 관계자분들, 달력 좀 많이 만들어 주세요.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이 세상 어머니들 모두가 귀貴 은행의 참 고객이십니다, 그렇죠?




* Title image by BNK Group

* 특정 은행에 대한 홍보가 절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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