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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29. 2021

그래도 굿바이

엘레이는 도대체 어딥니꺼


덕윤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온 것은 1984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일 학년이던 그 해 가을의 일이다.

전학생이 첫인사를 하는 것은 대개가 개학 첫날의 아침 조례 시간이 일반적인 경우였지만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이학기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시월 초순이었는데다 심지어 조례도 종례도 아닌 사교시, 담임이 맡은 국어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인사 구령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반장을 잠시 멈춘 담임선생은 복도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곧 누군가가 들어왔다. 피부가 약간 하얗고 눈이 크다는 것 외에는 평범하다는 말조차 별 의미가 없을, 그저 주위에서 흔하게 마주칠 법한 얼굴이었다.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게 된, 김 덕윤이다. 다들 친하게 지내도록. 너는 저기 빈자리에 앉아라.”

무언가 인사말을 준비한 것 같은 눈치였지만 담임이 등을 툭 떠미는 바람에 덕윤이는 몸을 한 번 휘청하면서 빈자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내 앞에 앉은 재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다, 여기.”


열네 살 장난꾸러기들이 친교親交를 시작하는 것에는 별다른 절차가 필요 없었다. 몇 페이지 할 차례라고 진도를 알려 주거나, 선을 넘어간 연필과 지우개를 돌려주거나, 챙기는 것을 깜빡 잊은 숟가락을 빌려 주거나. 덕윤이는 세 번째 경우였다.

바로 이어진 점심시간, 재우가 몸을 돌려 내 책상에 도시락을 올려놓았고, 언제 왔는지 지훈이는 소시지, 소시지 콧노래를 부르며 반찬 뚜껑을 열었다. 재우가 덕윤이를 슬쩍 쳐다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니, 도시락 안 싸왔나?”

덕윤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으, 으응. 엄마가 인사만 마치고 곧장 집으로 오라 하셨거든.”

그 말에 우리 셋의 눈이 화악 커졌다. 덕윤이가 처음으로 한 말은, 다름 아닌 '서울말'이었기 때문이다. 지훈이는 으어억 소리를 뱉으며 손을 내저었다.

“덕윤이 니, 서울에서 전학 왔나?”

“아니, 엘레이.”

덕윤이의 대답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일마가 지금 어디에서 왔다 카노? 아는 사람이 먼저 말해도 좋다는, 기특한 양보가 담긴 눈짓이었다. 셋 중 가장 똑똑하다고 우리 동네에서 검증된 재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에레이 말하나? 지난여름 방학 때 올림픽 했던 에레이 말이다.”

“임마, 김원기 선수가 금메달 딴 올림픽은, 에레이 아이가, 팔사(84) 에레이 올림픽. 덕윤이는 엘레이라 안 하나, 이 무식한 놈아.”

지훈이가 손가락으로 재우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그걸 본 덕윤이가 빙긋이 웃었다. 내가 덕윤이를 기억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그 웃음을 그때 처음 보았다.

“맞아, 거기가 엘레이야.”

“에레이든 엘레이든 밥부터 묵자. 이거 받아라.”

태세 전환만큼은 금메달감인 지훈이가 포크가 붙은 숟가락을 제 도시락 뚜껑에 올려 덕윤이에게 얼른 건넸다.

“빨리 받아라, 임마. 팔 아프다.”

곧 재우와 내가 밥을 덜어서 뚜껑에다 올렸다. 우리를 번갈아 보던 덕윤이가 뒤늦게 숟가락을 고쳐 잡았다. 그래도 동메달은 따야겠다 싶었던지 지훈이는 안 해도 될 말을 기어코 덧붙였다.

“그라믄 로스앤젤레스는 어디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덕윤이가 고맙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떡볶이를 샀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훈이가 또 실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우물우물 떡을 씹던 덕윤이가 그만 방귀를 퐁 하고 뀌었다. 방귀 소리는 우리와 똑같다며 모두는 신기해했다.

덕윤이는 말할 때마다 음, 암, 하면서 유난히 손동작을 크게 했다. 우리는 또 그것을 흉내 내거나 따라 하며 낄낄거렸다. 개구쟁이들이 친해지는 데는 그렇게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덕윤이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재미있는 친구가 생겼다고 재우는 좋아라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굿모닝, 미시즈 베이커. 아임 존. 하이 존, 하우 아 유.”

다음 날의 첫 수업은 영어였다. 우윤종 선생이 가래 낀 소리로 교과서를 먼저 읽으면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그것을 따라 했다.

“자, 주번. 그다음 문장 읽어봐라.”

겨우 한 줄을 읽었을 뿐인데 우 선생은 주번에게 짐을 넘겼다. 자신은 교탁 앞으로 가서 카세트테이프를 틀 작정인 것 같았다. 주번이 적당히 읽었다 싶었을 즈음에 우 선생이 다시 말했다.

“그 뒷사람, 계속 읽어라.”

플레이어에서 자꾸만 탈칵탈칵 헛도는 소리가 났다. 주번의 뒤에 앉은 이는 바로 덕윤이었다. 덕윤이가 책을 펴 든 채로 조용히 일어섰다.

“My family decided to go on a picnic on Sunday. My mom packed her lunch box and I had new clothes.”

하마터면 영어 선생이 카세트테이프를 튼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시사 영어사 미들 스쿠울 잉글리시’ 는 구절만 없었을 뿐, 덕윤이의 발음은 테이프 안에 살고 있는 마이클 선생님과 완전히 똑같았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놀란 것은 당연히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우 선생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물었다.

“니, 누고?”


호기심 많은 선생 덕분에 우리는 영어 시간 동안 본의 아니게 덕윤이의 성장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덕윤이는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돌이 되기도 전에 미국으로 갔고 줄곧 거기에서 자랐다. 엘레이에서 칠 학년을 다니다가 아버지가 다시 한국 발령을 받으면서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이걸 두고도 우리끼리 말이 많았다. 칠 학년이 있단다, 세상에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 때문에 당시 부산에서 유일한 미션 스쿨이자 남녀 공학이었던 우리 중학교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부터 영어 선생은 수업 시간에 카세트 플레이어를 준비하지 않았다. 책가방보다 훨씬 더 큰 플레이어를 들고 오느라 끙끙거릴 필요가 없어졌으니 주번들이 우선 좋아했다. 대신 덕윤이는 바빠졌다. 문장뿐만 아니라 영어 단어 한 개라도 눈에 띄기만 하면 덕윤이가 모조리 읽어야 했다. 하지만 싫은 내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 덕윤이를 위로한답시고 우리는 떡볶이를 계속 사 먹였다. 입가에 벌건 양념을 묻힌 채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영어를 잘하는 덕윤이가 참 부럽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키지 못할 심각한 사건이 바로 그 영어에서 터졌다.




학교에서는 매달 월례 고사를 치렀다. 국어, 영어, 수학, 국사가 대상 과목이었다. 우리는 매일 오후 지훈이네 집에 모여 공부를 했다. 덕윤이를 데리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윤이는 공부보다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른이 되면 디즈니랜드부터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덕윤이의 화려한 설명 덕분이었다. 어찌나 미국 이야기를 재미나게 했던지 지훈이가 나서서 끊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랜드캐넌이라는 계곡에서 영영 길을 잃을 뻔 했다. 그러는 동안, 시험이 끝났고 다시 영어 시간이 되었다. 채점을 마친 답안지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몇 점 받았노?”

“팔십 점입니다.”

찰싹찰싹. 영어 선생은 학생들을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점수를 말할 때마다 구십 점으로부터 오점에 한 대씩 회초리를 내리쳤다. 그 달 시험이 꽤나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우도, 지훈이도, 나도 서너 대씩을 이미 맞았다. 지릿지릿한 손바닥을 허벅지 밑에 집어넣어 겨우 달래고 있을 즈음이었다.

“뭐어, 이십 점?”

영어 선생이 난데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놀라서 앞을 쳐다보았다.

덕윤이가 교탁 앞에 서 있었다.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미국에서 온 덕윤이가 영어를 이십 점 받았단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쟤가 우리 반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었어? 그래, 영어를 잘하는 것 맞지. 그런데 덕윤이가 잘한 건 영어지, 영어 과목이 아니잖아?

“손바닥 대!” 선생이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때 덕윤이가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싫어요.”

는 귀를 의심했다. 선생이 때리겠다고 손을 갖다 대라는데, 감히 학생이 싫단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뒤로 넘기는 영어 선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덕윤이가 말을 이었다.

“답을 아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시험인데, 답을 모른다고 해서, 틀렸다고 해서 왜 맞아야 되나요? 그럼 학생들 모두가 무조건 백 점을 맞아야 하는 건가요?”


상관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절이었다. 이성을 상실한 야만이 훈육으로 포장되던 시절이었다.

선생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도 걸핏하면 학생을 때렸다. 정신 교육이라는 명목이었다. 선생이 때리면 학생은 맞아야 했다. 행여 집에 가서 그 사실을 전하면 돌아오는 답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선생님께서 너를 때리셨겠지’ 거나 아니면 ‘너한테 각별한 애정이 있으니까 너를 사람 만드시려고 때리셨겠지’였다. 그래서 맞아도 맞았단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때리면 때리는가 보다 하면서 맞았다.

시험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틀렸으니까, 정답을 못 맞혔으니까, 내가 공부를 안 했으니까,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하더라도 틀렸으니까, 잘못했으니까, 그래서 때리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저 감사히 맞아야 한다. 그런데 덕윤이가, 고작 열네 살 덕윤이가, 모두가 존경해야 하는 선생님께 반기를 든 것이다. 시험의 정답을 맞히지 못했을 뿐인데 왜 때리는 것이냐고, 눈을 부릅뜨고서 말이다. 전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리고 상상해서도 안될 상황이었다. 열네 살 중학교 일 학년 학생이 감히 존경해마지 않아야 할 영어 선생님께 저런 말을 하며 대들다니. 상상해서는 안될 상황의 다음 장면은 역시나 상상 그대로였다.


"이 자식이 영어 좀 잘한다고 봐 줬더니..."

급기야 소매 단추를 풀어 젖힌 선생이 덕윤이의 뺨을 올려붙이기 시작했다. 철썩철썩. 뺨을 때리는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앞줄에 앉은 꼬맹이 여학생들은 결국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야 덕윤이는 자리로 돌아왔다.

덕윤이는 수업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선생은 교단에서 손가락질을 해가며 덕윤이에게 욕설과 함께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억지로 참았다. 자꾸만 내가 울 것 같았다. 하지만 덕윤이의 그 큰 눈에 끝내 눈물은 고이지 않았다.

그날 수업 후, 덕윤이는 우리보다 앞서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어울려 놀지 않고 조용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 날, 덕윤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재우와 지훈이는 우리가 덕윤이 집에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을 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덕윤이의 집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사흘이 지고 나흘째 되던 금요일 오후 종례 시간에 뜻밖에 덕윤이가 교실 문으로 들어섰다. 담임의 뒤를 따른 것이었고, 복도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한 분 서 있었다. 교탁에 선 담임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에, 그동안 정들었던 덕윤이가 다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예상 밖의 통보였다. 이제 막 정을 붙이려나 했는데 겨우 한 달만에 전학이라니. 그것은 아마도….

처음 우리 앞에 올 때처럼 이번에도 담임은 덕윤이의 등을 떠밀려는 시늉이었다. 그런데 덕윤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복도 밖의 눈치를 슬쩍 본 담임이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사말 속에 재우, 지훈이, 나에 대한 언급이 살짝 들어 있었던 것 같고, 그 밖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확실하게 이 말로 마무리했다.

“모두들, 굿바이 Good Bye.”


덕윤이는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며 창문 너머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뒷발을 한껏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우도, 지훈이도, 나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본 덕윤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우리는 그 뒤에도 이따금 덕윤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유창한 영어 발음과 함께 엘레이라고 말하던 것과 영어 선생에게 하릴없이 얻어맞던 그 날의 에피소드를 씁쓸하게 되풀이할  때도 있었다. 구태여 잊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어 시간은 매주 세 시간씩 있었고, 그때마다 녹음기 속의 마이클 선생님은 덕윤이를 저절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영어와 떨어지지 않고 살았다. 첫 직장 무역 회사에서부터 외국인 전용 호텔을 운영했던 근간에 이르기까지 영어는 늘 내 옆에 있었다. 자전거처럼 한 번 배우면 그대로 오래오래 써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놈의 영어는 늘 단어를 익히고 외우며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수능과는 거리가 먼 학력고사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수능이 끝나면 외국어 과목들의 시험지를 찾아 시간을 재가며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지를 출력할 때까지는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시험 시간을 재는 모래시계보다 더 빨리 줄어들었다. 결국 시험의 끝을 알린 것은 알람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온 욕이었다.


올해 수능시험은 예년과 유사하게 평이하게 출제되었으며


'내가 영어를 꽤 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구나.'


커피를 들고 베란다에 나섰다. 풀다 만 시험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영어와 영어 과목은 다른 것이랬지? 수능 시험 덕분에 오래간만에 덕윤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그 모습 변하지 않고 여전히 씩씩하게 잘 살고 있겠지. 굿바이 다음은 '롱 타임 노 씨'라고 했으니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하우아유' 할 날도, '파인탱큐'할 날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앤드유'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니, 일단은 그렇게 말할 날을 기다려볼 일이다. 단, 절대로 멍하니 앉아있지 말고 틀린 발음부터 하나씩 찬찬히 고쳐가면서 말이다.


"엘레이, 엘레이, 화인 땡스, 앤쥬, 덕윤?"




Image by F1Digital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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